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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신앙생활 > 신앙생활일반
· ISBN : 9788904166893
· 쪽수 : 200쪽
책 소개
목차
들어가는 말 우리에게 시편이 중요한 이유
1장 길 잃은 마음에 시편 1편을 채우다
“복 있는 사람은……”
2장 낙심한 마음에 시편 42편을 채우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3장 후회하는 마음에 시편 51편을 채우다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4장 자녀의 마음에 시편 103편을 채우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5장 분노하는 마음에 시편 69편을 채우다
“주의 분노를 그들 위에 부으소서”
6장 새로운 마음에 시편 96편을 채우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초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리뷰
책속에서
시편 기자는 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1절)라는 말로 시작했을까요? 그냥 “악을 행하지 말고, 죄를 범하지 말고, 오만하게 굴지 말라.”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왜 ‘악’과 ‘죄’와 ‘오만’이 아닌,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를 집중하게 했을까요?
그러니까 시편 기자는 왜 우리가 영향을 받는 누군가에게 초점을 맞추었을까요? 왜 악인들의 영향을 받지 말고, 죄인들의 영향을 받지 말고, 오만한 자들의 영향을 받지 말라고 반복해서 경고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시편 기자가 여기서 대조하려는 것이 ‘악’ 대 ‘의’가 아니라, 무엇이 미치는 ’영향’ 대 다른 무엇이 미치는 ‘영향’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시편 기자는 우리의 마음을 빚는 두 가지 방식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과 감정이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에 의해 빚어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교훈에 의해 빚어지게 할 것인가?”
시편 기자가 1절을 이렇게 쓴 이유는 2절과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악인, 죄인, 오만한 자)에 관심을 두면 세상의 방식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관심을 두는 대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2절)하십시오. 그것이 복입니다.
누구도 의무감 때문에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누구도 의무감 때문에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누구도 의무감 때문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원해서 악인의 꾀를 따르고, 스스로 원해서 죄인의 길에 서고, 스스로 원해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따르기 원하는 이유는, 그 방식에 매력을 느낄 만큼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을 묵상한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의 방식을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즉 그들에 의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빚어졌습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는 방식입니다. _1장 길 잃은 마음에 시편 1편을 채우다
시편 기자는 낙심한 중에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인정합니다. 5절과 11절에서 그는 도우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잊으신 것 같다고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모든 역경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7절에서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의’ 파도와 ‘주의’ 물결이 그를 휩쓴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들이 모두 ‘하나님의’ 파도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이 위대한 진리를 결코 놓지 않습니다. 이 진리는 그가 탄 믿음의 조각배의 바닥짐입니다. 이 진리는 그가 감정의 혼돈 속에서 전복되지 않게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삶 속에서 이 같은 진리를 배웁니다. 만약 하나님이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지 않으셨다면 고난 중 그 어디에서도 안식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모든 시련 가운데 그리고 모든 시련을 통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인정합니다. _2장 낙심한 마음에 시편 42편을 채우다
이 시편에서 다윗이 직접적으로 성적인 문제에 대해 기도하지 않았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그의 모든 타락은 성적인 문제에서 시작해 거짓말과 살인으로 이어진 것 아닙니까? 글쎄요, 정말 그럴까요?
다윗은 왜 성욕을 절제하게 해 달라고 부르짖지 않았을까요? 그는 왜 사람들이 자신에게 책임을 묻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왜 음란한 이미지와 생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곧 성적인 죄는 병의 근원이 아닌 증상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기에 성적인 죄를 짓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안정적이거나 견고하거나 굳건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그들은 유혹에 넘어갑니다. 이는 그들의 감정과 생각 안에 하나님을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이 기도는 성적인 죄를 저지르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이 시편에는 성과 관련된 말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그리고 굳건하고 요동치 않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8, 12절).
다윗은 자원하는 심령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착취하기보다 사람들에게 관대하기를 원합니다. 다윗의 이 기도에는 우리를 위한 심오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_3장 후회하는 마음에 시편 51편을 채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