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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선물 1

국왕의 선물 1

(선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심경호 (지은이)
  |  
책문
2012-06-15
  |  
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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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선물 1

책 정보

· 제목 : 국왕의 선물 1 (선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31575859
· 쪽수 : 520쪽

책 소개

조선이 탄생한 지 620년이 되는 해를 맞아, 역대 조선의 27대 국왕들이 사대부들에게 유형무형의 다양한 '선물'을 증여함으로써 긴밀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흥미로운 과정을 담고 있다. 국왕들은 이 '선물'을 통해 사대부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렸는데, 저자는 이와 관련해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수많은 문헌들, 관련 인물들과 유물들에 대한 역사적 사건과 비사까지 풍성하게 담아냈다.

목차

책머리에

1장 태조, 동북면 도선무순찰사 정도전에게 동옷을 내리다
2장 태조, 공신 조준에게 화상을 하사하다
3장 정종, 격구에 능한 조온에게 말 한 필을 하사하다
4장 태종, 교서관의 홍도연에 궁온을 내리다
5장 태종, 공신 하륜에게 궁중 의원을 내려 보내다
6장 세종, 시승 만우에게 옷을 하사하다
7장 세종,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입고 있던 홍단의를 내려 주다
8장 세종, 도승지 이승손에게 온천욕을 하사하다
9장 세종, 중국 사신에게 《황화집》을 선물하다
10장 문종,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을 기복시키고 의복을 내려 주다
11장 문종, 전염병이 창궐하는 황해도에 벽사약을 내리다
12장 단종, 김충·인평 등의 집을 양녕대군·효령대군 등에게 내려 주다
13장 세조, 신숙주에게 소주 다섯 병을 부치다
14장 세조, 정인지에게 춘번자 삽모를 하사하다
15장 예종, 유자광에게 초구 한 벌을 내려 주다
16장 예종, 공신들의 비를 세워 주라고 하다
17장 예종, 호랑이를 쏘아 바친 적성현 정병에게 동옷 한 벌을 내리다
18장 성종, 한명회에게 압구정시를 손수 적어서 내려 주다
19장 성종, 주자청 당상관 이유인에게 놋쇠솥을 하사하다
20장 성종, 달성군 서거정에게 호피를 하사하다
21장 성종, 천문학원 이지영에게 명주 저고리를 하사하다
22장 성종, 영안도 관찰사 허종에게 보명단을 내리다
23장 성종, 유구 사신을 칭하는 일본인에게 조선의 토산품을 내리다
24장 성종, 독서당의 문신들에게 수정배를 선물하다
25장 연산군, 좌의정 성준에게 답호를 내리다
26장 중종, 홍문관 수찬 조광조에게 털요 한 채를 내리다
27장 인종, 좌의정 홍언필에게 산증의 처방약을 내리다
28장 명종, 조식에게 약재를 내려 보내다
29장 명종, 신하들에게 서총대 연회를 내리다
30장 선조, 원접사 이이에게 호피를 내려 주다
31장 선조, 호성공신 유성룡에게 백금을 내리다

부록1 _ 조선시대 국왕의 선물 증여에 관하여
부록2 _ 이 책에서 다룬 국왕의 선물 증여

도판목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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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심경호 (지은이)    정보 더보기
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55년 충북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및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학 입문』 『김시습 평전』 『안평』 『김삿갓 한시』 『내면기행』 『산문기행』 『한국의 석비문과 비지문』 『호, 주인옹의 이름』 30여 종이 있다. 역서로 『주역철학사』 『서포만필』(상·하) 『심경호 교수의 동양 고전 강의: 논어』(1~3) 30여 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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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정난에 가담하고 새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과 역적을 잡은 사람들은 포상을 받았다. 하지만 정난에 죽임을 당한 사람, 새 정권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식은 재’가 되었다.
대대로 조선 조정은 역적의 집과 가솔들을 몰수하여 공신들에게 배분했다. 여성들도 그 배분의 대상이었다. 역적죄로 몰려 공신들의 여종이 되는 것을 공신비(功臣婢) 혹은 공신비첩(功臣婢妾)이라고 했다.
윤근수의 《월정만필》에 보면, 단종의 왕비 송씨가 관비가 되니 신숙주가 공신비를 삼아서 자기가 받으려 했다. 그러나 세조가 그의 청을 듣지 않고, 송씨를 궁중에 들어오게 하여 정미수(鄭眉壽)를 기르라 명했다. 정미수는 정종(鄭悰)과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사이에 태어났으며, 뒷날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다.
(중략)
이듬해 예종 원년(1469년) 1월 10일(을축)에 상당군 한명회는, 난신의 처첩과 자녀를 공신에게 주어 노비를 삼게 하는 것은 율문(律文)에 기재되어 있고, 세조 때도 그 처첩과 자녀 및 전지를 모두 공신에게 주었다는 이유를 들어, 남이의 처첩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다. 1월 21일(병자)에는 남이의 금은(金銀)을 적몰하여 정업원에 주도록 했다. 1월 26일(신사)에는 남이의 남양 전지를 봉보부인 김씨에게 내려 주었다. 봉보부인은 외명부의 종1품 품계로, 임금의 유모에게 주던 작위였다.
그해 2월 7일(임진)에는 더욱 잔혹한 일이 일어났다. 예종은 의금부와 장례원에 전지하여, 역적죄에 연루된 이들의 처와 첩, 계모, 첩의 딸, 누이, 조이(召史) 33명을 모두 공신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명했다. 이로써 서른세 명의 여인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용재총화》에 보면 정난공신으로 정2품에 이른 봉석주는, 조정에서 난신(亂臣)의 처첩을 공신에게 노비로 줄 때, 자색이 있는 여인을 구해 첩으로 삼고 밤낮으로 마음껏 마시며 지냈다고 한다. 봉석주는 나중에 모반죄로 죽임을 당했으니, 정난으로 고통 받는 집안의 처첩을 유린한 벌을 받았는지 모른다. - 1권 12장 단종, 김충·인평 등의 집을 양녕대군·효령대군 등에게 내려 주다


유성룡은 호성공신이었지만 선조 37년 10월의 삼공신 회맹연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는 그 이듬해 정월에 특별히 백금을 하사한 것이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이전인 선조 23년(1590년) 5월, 49세에 우의정이 되었고, 종계변무의 공으로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3등, 풍원부원군(?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는 좌의정이 되었고, 이조판서를 겸했으며, 대제학도 겸했다. 그해 명나라에 왜의 실정을 통보하자고 요청했고,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천거했다. 선조 25년(1592년)에는 특명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때 세자 책봉을 건의하여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
윤국형(尹國馨·1546~1611년)의 《문소만록(聞韶漫錄)》에 따르면, 임진년 4월 그믐에 대가(임금의 수레)가 도성 문을 나가서 종일 비를 맞으며 임진강에 이르러 배를 탔을 때, 선조가 정승 유성룡에게 이르기를, “경이 항상 나라의 방비가 소홀하다고 경계하더니,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구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선조가 시종이 지닌 소주 한 병을, 뱃사공이 지닌 사기 종지로 한 잔씩 돌렸다. 저물녘에 동파역에 이르렀을 때 밤비가 죽죽 내렸으나 사람들이 모두 굶고 잤다. 선조가 먹을 음식도 군사들에게 뺏기게 되어 찬성 최황이 쌀 두 말을 바쳤다고 한다. - 1권 31장 선조, 호성공신 유성룡에게 백금을 내리다


영조는 재위 50년째 되던 1774년 6월 5일(정해), 특별히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과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을 파직(罷職)했다. 이유는 그들이 하사 받은 제택(第宅)에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창성위나 청성위는 국왕의 사위인 부마에게 주는 위호(位號)다. 그렇다면 대체 왜 황인점과 심능건은 하사받은 집에서 살지 않았을까?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중략)
황인점은 정조 연간에 여섯 차례나 사신으로 연경에 갔다. 사행은 청나라의 정세를 탐색하는 심세(審勢)의 임무를 지니고 있었고, 연행 중에 별단(別單)을 작성해서 비밀리에 신속하게 보고하고, 또 귀국한 뒤에는 대개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연행기 형태로 사적인 여정을 정리했다. 황인점이 정조의 명으로 6회나 사행을 한 것은 심세와 관련해서 특별한 밀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어떤 별단이나 보고서를 작성했을까? 그렇게 빈번하게 청나라의 정세를 관찰했으면서도 사적인 연행기조차 남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또한 정조 연간에는 탕평책을 와해시키려는 세력들에 의해 천주교 문제가 늘 부각되었다. 그렇거늘 황인점은 어째서 정조의 서거 후 순조 초에 이르러서야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을까? 혹시 화유옹주가 생전에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사랑을 받았기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 황인점이 보호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 2권 18장 영조, 부마 황인점에게 저택을 선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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