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2028811
· 쪽수 : 127쪽
책 소개
목차
제1부
늦봄
하리 선착장
빗물 펌프장
내손동
청평
누옥의 방 한 칸
사일로가 보이는 식탁
비문을 옮기는 포클레인의 후미
오징어
짙은 백야
죽변(竹邊) 바다
공터의 벽시계
서대길
계단
철제계단 난간 손잡이
백사
외딴집
드르니항
생강
서대마을에서
제2부
산길
눈길
오디가 익을 무렵
벽난로
서리가 비늘을 반짝일 때
목화
장독 깨지다
전신거울
들깨를 터는 저녁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이제 다시 동두천에 가지 못하네
가뭄
달이 보이는 잠깐
모종삽을 들고
재봉틀 발판을 베고 잤다
달개비
사월의 눈
뒤뜰에 무화과
메꽃
팬지
삐비꽃
제3부
오리는 왜 머리를 뒤로 돌리고 자는가
탱자꽃
배알미동
의자
염소 방목장
사과꽃
타조
차광막
과수원
용광로
겹삼잎국화 한 묶음
배꽃
백사장
피정의 집
칡즙
애걔걔
끝물
차에서 자는 인간
해바라기 뒤틀린 씨방까지
소파생활자
추석
해설 | 최현식 ‘늙은 시절’을 기록한다는 것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베란다 창문을 반나절 열어놓고 외출했는데 접어놓은 카펫 움푹한 자리에 새끼를 들여놓은 꿩이 종적을 감추었다 털이 나기 시작한 새끼 꿩 세 마리는 쉬지 않고 울었다 밥풀을 으깨주고 조를 부셔주고 생수를 따라주었는데 거들떠보지 않았다 밤이 되어 털옷을 깔아주고 전기난로를 틀어주었는데 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감기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울고 또 울었다 연초록 떡갈잎이 돋아난 야산으로 통하게 베란다 창문을 열어놓았는데 밤사이 어미는 돌아오지 않았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 졸기를 반복하는 새끼 꿩 세 마리가 똥오줌을 깔고 앉아 쉰내를 풍기며 울었다 약한 불에 올려놓은 찜통의 사골이 졸아드는 반지하 어미를 찾는 아이들 울음이 들렸다 지독한 노린내를 풍기는 연기가 주방후드에서 쏟아져 나와 담쟁이를 감고 올라갔다
―「늦봄」 전문
화단을 지키는 고양이 밥그릇에다
성견 사료 한 알 한 알 떨어뜨려줬더니
골이 났는지 눈길도 주지 않더라
마름모꼴 방 끝의 티브이를 켰더니
화면 중심으로 불 꺼진 성냥골이
쏜살같이 떨어지더라
백합이 품은 짙은 백야를
필사적으로 걸어온 자
물소리를 틀어놓고
자갈을 뒤집는 잠이 들었다
한 번은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최후의 툰드라를 틀어놓고
잠이 들어버린 자
바가지에 틀니를 벗어놓고
옛날 맛 그대로인 김치 씹은 물을 오물거렸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
딱따구리조각마법사
세 시 반의 맨발을 위해
오동나무 상판에 가로의 숨구멍을 뚫었다
카페의 목조계단은 비좁았고, 반들거렸다
음울한 클래식이 지름길로 들어오고 나갔다
그만이 무덤에 갔다 돌아왔다
짙은 백야를 걸었다
천년만년 본드를 흡입하고
봅슬레이를 타고 내려갔다
죽은 자의 힘을 빌려 살지 않겠다
냉골 바닥 거대한 십자가 앞에 팽개쳐져
떨거지가 되지 않겠다
―「짙은 백야」 전문
바깥마루에 털퍼덕 앉아서는 물가에 선 미루나무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미루나무는 수심을 닮아서 하늘을 자신의 키 높이로 끌어내려 황혼의 취기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올 사람 아무도 없는데 나는 어느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오지 않았기에 나는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쯤 억새가 피기 시작했을까요
내 늙은 시절이 떠오릅니다 내 애인은 나와는 육십 살 정도 차이가 났습니다 나는 슬픔을 안고 살았습니다 돌팔이 의사들은 거의가 단명했습니다 나를 업고 사기전골 돌팔이 의사에게 뛰어가던 어머니 나는 노루의 등에라도 탄 듯 뜨겁게 안겨오는 피의 온기에 맘껏 젖어 시들었다 피는 꽃이곤 했습니다 내 몸은 십대 초반이었고 내 마음은 칠십이 조금 넘었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십대 초반이고 내 몸은 칠십이 넘었습니다 나는 누구를 업고 뛴다는 걸 상상조차 못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물가에 선 미루나무는 그만 한 쇠꼬챙이로 내 쓰라린 슬픔의 한나절을 후비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돌팔이 의사들은 단명했고 불에 구워지는 미루나무 쇠꼬챙이 물가에 우뚝 서 있을 것입니다 황혼녘 나는 알싸하게 취해 뒤로 짚은 힘없는 두 팔에 몸을 바치고 저 세상인 듯 물가 미루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간혹 동전을 두 손안에 모으고 흔드는 것처럼 경운기가 지나가고 번쩍거리는 차들이 아스팔트 바닥에 바퀴로 해괴한 비명을 연주할 것입니다 돈사(豚舍) 지붕 앞으로 뻗어 나온 밤나무 가지에선 밤송이들이 입안에 세 알 두 알 한 알씩 알밤을 물고 있을 겁니다 나는 그런 말을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추석」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