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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2035796
· 쪽수 : 208쪽
책 소개
목차
스토커
50번 도로의 룸미러
드레스 코드
메인스타디움
해설 생존 지능이 진화할 때(강유정)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남들 보기와 다르게, 그녀의 삶에는 난관이 많았었다. 이십대의 이른 나이에 어머니가 죽었고, 결혼 4년 차에 남편이 교통사고로 즉사했으며, 사별의 아픔을 다 이겨내기도 전에 여섯 살이었던 아들이 실종됐었다. 납치설도 제기되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버지는 딸 또래의 여자와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그녀의 일상을 점철하는 그 깊은 침묵은, 가혹한 삶의 비극을 견디는 방식 중 하나일 거라고 건너짚곤 하였다. 이렇듯 가련한 그녀에게 더 이상의 불행은 일어나지 말아야 했다. (「스토커」)
예물로 남아프리카에서부터 공수해온 5캐럿 다이아 반지를 받았을 때나, 굵은 한강 줄기부터 북한산까지 내다보이는 78평 초고층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나, 풀 옵션이 돼 있는 BMW535와 은빛 카이엔을 동시에 받았을 때도 그때와 비슷한 심정이었을까. 단 한 가지라도 자신의 취향과 의사가 반영되었다면 조금 더 흡족했을까. 여자는 그때마다 몸속 내장의 일부가 조금 잘려 나간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아리아리한 통증에 부딪혔다.
여자는 그 감정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다. 알고자 골몰해본 적도 없었다. 무언가 알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전에 여자의 품에 안긴 모든 것에 매료되었다. 그것들은 정확한 이미지가 있었다. (「50번 도로의 룸미러」)
엄마는 아름다웠지만 벌거벗은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드레스를 입은 후의 자신을 사랑했다. 아침에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엄마가 옷장의 손잡이를 잡을 때면 그 권태로운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곤 했다. 부신 아침 햇살 속에 늘 늘씬한 몸매를 고수했던 엄마의 실루엣이 선연했다. 엄마의 벗은 몸에서는 늘 은은한 모과 향기가 풍겼다. 옷장 문짝들이 분만실에 누워 있는 가랑이들처럼 차례로 힘껏 벌어졌다. 엄마는 단 한 번 옷장 속을 찬찬히 훑어보고는 산부인과 의사처럼 옷장 속에 손을 밀어 넣었다. 엄마의 손에는 바느질이 고르고 선이 잘빠진 감 좋은 옷이 물려 나왔다. 옷을 입은 엄마의 몸짓을 보며, 엄마가 어떤 브랜드를 좋아하는지 터득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건 우아함을 피력하는 샤넬 투피스와 관능미를 강조하는 현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아, 이제야 완벽해! 비로소 빙긋이 미소 지으며 무대 위 주연 발레리나처럼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꼿꼿하게 세우고 허리를 활처럼 펼쳤다. 창문 앞, 전신 거울 속에는 그런, 엄마가 있었다. 아름다움을 그토록 중요시 하는 엄마에게 내 존재는 어쩌다 충동적으로 딸려 온 싸구려 옷에 지나지 않았다. (「드레스 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