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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32317120
· 쪽수 : 320쪽
책 소개
목차
들어가는 글
1부. 사람 사는 곳에서는 늘 사건이 끊이질 않으니
명량 바다에서 이순신의 진짜 모습은?/ 어우동은 왜 공공의 적이 됐는가?/ 홍순언은 어떻게 외교의 달인이 됐을까?/ 조식은 왜 자꾸 지리산에 올랐을까?/ 김만덕이 여성 CEO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왜 허균은 ‘천지 사이의 괴물’로 불렸을까?/ 선죽교의 핏자국, 그 진실은 무엇일까?/ 조선 시대의 애서가는 누구였을까?
2부. 기록한 것과 기록된 것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왜 조선은 자꾸 역사를 남기려고 했을까?/ 최초의 세계지도는 어떻게 조선에서 나왔나?/ 『택리지』에서는 어떤 곳을 살기 좋다고 했을까?/ 조선의 풍물을 기록한 인문지리서는 무엇일까?/ 왜 할아버지는 손자의 성장과정을 기록했을까?/ 박지원의 눈에 비친 청나라의 모습은?/ 조선이 실록을 보관했던 방식은?/ 오희문이 기록한 임진왜란의 피난길 모습은?
3부. 담배를 피며 한양을 거니는 하루하루
정약용은 왜 5일에 한 번씩 개고기를 먹자고 했을까?/ 조선의 르네상스는 어디서 꽃 피웠을까?/ 경복궁은 왜 ‘경복궁’일까?/ 조선에도 신고식 문화가 있었다?/ 왜 조선 시대의 그림에는 담배가 자주 등장했을까?/ 한양 한복판의 무릉도원은 어디였을까?/ 조선의 지식인들은 어디에서 공부했을까?/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설립했던 이유는?/ 문익점의 목면은 어떤 혁명을 갖고 왔을까?
4부. 조선의 왕으로 살아간다는 것
정조가 매일 일기를 썼던 이유는?/ 광해군은 어떻게 세금 정책을 바꿨을까?/ 세종은 왜 5개월 동안 궁민투표를 실시했을까?/ 영조의 반값 군포는 과연 성공했을까?/ 왕비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왕실의 비서실에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까닭은?/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논리는 무엇일까?/ 정도전이 주장했던 왕의 최고 역할은?/ 왜 조선의 왕들은 활자를 개발하려고 했을까?
5부. 백성들의 괴로움이 내 아픔이고
조광조의 답안지는 어떻게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조선은 왜 헌법 제정에 공을 기울였을까?/ 예치를 지향한 조선의 국가 이념은 무엇이었나?/ 이지함이 백성 속으로 들어간 까닭은 무엇일까?/ 조식이 백성을 두려워하라고 한 이유는?/ 이산해는 왜 자꾸 소금을 굽자고 했던 것일까?/ 후계자 계승을 둘러싼 당파 분열의 결말은?/ 조선의 내시들은 어떤 일을 했는가?/ 조선이 지진에 대처했던 방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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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어우동을 죽음으로 몬 것은 성종의 의지였다. 본격적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전파하려던 시대에 나온 ‘어우동’이라는 돌출 인물은 성리학의 이념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캐릭터였다. 시범적으로라도 어우동을 처형해서 조선의 모든 여성에게 반면교사로 삼게 하자는 뜻이 피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우동이 처형된 1480년 10월은 성종의 왕비인 윤씨가 1479년 폐위되었다가 1482년 죄인을 대우하여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한 시기와도 묘하게 맞물린다.
왕실에서 왕의 권위에 도전했던 폐비 윤씨와 민간에서 남성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죽음을 맞이한 어우동의 모습에는 겹치는 부분이 있다. 두 사람을 처형한 인물은 성종이었고, 성종 시대는 성리학의 이념을 국가와 사회 곳곳에 전파하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우동과 폐비 윤씨는 이러한 시대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어우동은 왜 공공의 적이 됐는가?)
『택리지』에서는 어떤 곳을 살기 좋다고 했을까? (중략) 셋째 조건은 ‘인심’이다. 이중환은 “그곳 풍속이 좋지 못하면 자손에게도 해가 미친다” 하여 풍속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팔도의 인심을 서로 비교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서민과 사대부의 인심이나 풍속이 다른 점을 강조하면서, 당쟁의 원인과 경과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 인심이 정상이 아님을 통탄했다. “오히려 사대부가 없는 곳을 택해 살며 교제를 끊고 제 몸이나 착하게 하면 즐거움이 그중에 있다”라고 한 대목에서도 보이듯 이중환에게 집권 사대부의 권위주의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마지막 조건으로는 ‘산수’를 들면서 “집근처에 유람할 만한 산수가 없으면 정서를 함양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산수의 경치가 훌륭한 곳으로는 영동을 으뜸으로 삼았다. (『택리지』에서는 어떤 곳을 살기 좋다고 했을까?)
정도전은 태조의 명을 받고 『시경』의 「주아」편을 인용해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으로 정했다. 그가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궁궐 건축이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넓은 집에 편안하게 거주할 때는 추위에 떠는 선비 덮어줄 것을 생각하고, 서늘한 전각에 살면 시원한 그늘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런 후에야 만민의 받듦에 대해 저버림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대목에서 왕도정치와 민본 정치를 국가의 이념으로 설정한 사대부 출신 학자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런 이념이 반영되어 건립된 경복궁은 광화문에서 강녕전까지 390여 칸의 전각으로 구성된 소박한 규모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 때 중건한 경복궁의 전각이 7,400여 칸에 달한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었다. (경복궁은 왜 ‘경복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