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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32473598
· 쪽수 : 360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 진화하는 파벌 투쟁
제1장 창검의 시대
당쟁은 조선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곰과 호랑이의 파벌 투쟁
환웅과 곰이 승리한 원동력
고조선을 이류 국가로 전락시킨 파벌 투쟁
신선교 권력을 위협한 세계 사상계 변화
변한이 진한의 권위에 도전하다
은나라 일부가 한민족 파벌로 합류하다
곳곳에서 나타난 외래인과 토착인의 대결
한민족에 스며든 흉노족의 후예들
신선교에서 불교로의 종교 개혁
비선 실세 1 - 백제의 경국지승(傾國之僧), 도림
비선 실세 2 - 신라의 팜므 파탈, 미실
서진파와 남진파의 파벌 투쟁
연개소문, 슈퍼 정권을 세우다
한민족의 역사를 바꾼 비주류 연대
사대파의 집권과 쟁장 논란
사대파에 도전장을 내민 북벌파
조선 역사상 1천 년 이래 최대 사건
무사 파벌의 헤게모니 탈환, 1170년 무신 정변
비선 실세 3 - 왕을 탄핵시킨 거세한 남자, 고용보
사병 혁파와 문인의 주도권 확보
사대주의파, 조선의 핵심을 차지하다
제2장 사약의 시대
창검에서 사약으로 권력 투쟁이 바뀌다
문인의 지배와 사약의 주무기화
즉각적이지 않은 사약의 약효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
연산군의 등장과 파벌 정치의 위기
중종반정 이후 사림파의 도전과 실패
시련 속에 거둔 사림파의 영구 집권
문정왕후 시대에 반짝 등장한 불교 파벌
비선 실세 4 - 유교 왕국에 불교를 진흥시킨 승려, 보우
사림파의 끊임없는 분열
비선 실세 5 - 2인자까지 굴복시킨 왕의 여자, 김개시
철학자들이 정치 투쟁을 하는 방식
사림파 시대를 위협하는 환국 정치
환국 정치를 토대로 결실을 맺은 꿈의 정치, 탕평
영조가 탕평 정치를 할 수 있었던 이유
탕평의 후유증, 세도정치
비선 실세 6 - 왕자급의 작위를 받은 무당, 진령군
제3장 투표의 시대
한민족의 지향점이 된 국민주권 이념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의 분리
지주 출신 친일파가 주도권을 잡다
양반 지주층과 타협한 일제
일제강점기 아래 조선인의 정치 활동
건국준비위원회의 한반도 장악
친미파 사대주의 진영의 대한민국 접수
투표의 시대를 실감케 한 두 사건
현대판 무신 정권의 등장
군의 사조직 하나회와 알자회의 시작과 변천
파벌 투쟁의 역사적 전환점이 된 1987년
비선 실세 7 - 이결명이란 한자명을 가진 제임스 릴리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한 제3세력의 출현
비선 실세 8 - 왕세자 더하기 도승지 더하기 영의정, 김현철
에필로그 - 촛불 혁명과 파벌 투쟁의 미래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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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단군 신화에 등장한 환웅ㆍ곰ㆍ호랑이, 이 셋은 기록상으로 나타난 우리 민족의 정치 파벌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 땅에, 그리고 우리 민족에 파벌이 있었겠지만. 역사 기록에 나오는 파벌로는 이 셋이 최초다. (중략)
단군 신화는 환웅의 관점에서 우리 민족의 형성을 기록한 것이지 곰이나 호랑이의 관점에서 기록한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 신화에서 말하는 ‘사람’은 환웅 쪽을 가리킨다.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곰 부족이 환웅 부족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호랑이가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호랑이 부족이 환웅 집단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환웅 부족은 외래인 집단이지만, 곰ㆍ호랑이 부족은 토착 부족으로 볼 수 있다. 곰과 호랑이 부족은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 살았을 것이다. 혈통적으로 보면, 환웅에 비해 곰과 호랑이 부족이 우리 민족과 더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런데 환웅이라는 외래 종족이 출현해 새로운 문화를 강요했다. 이 같은 외부의 충격을 곰 부족은 수용했고, 호랑이 부족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곰 부족은 환웅의 통치 이념과 신앙을 받아들인 데 반해, 호랑이 부족은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환웅ㆍ 부족 연합과 호랑이 부족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기록상으로 유추할 수 있는 우리 민족 최초의 정치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투쟁은 이전에도 있었겠지만, 한민족의 원형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 투쟁으로는 단군 신화가 기록상 최초이다.
고대 한민족 사회는 신선교 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렇다 보니 이주민이든 토착민이든 신신교를 믿지 않고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유교가 조선 시대를 지배했듯이, 고대에는 신선교가 그런 역할을 했다. 신선교는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약해졌다. 그것이 고조선 해체의 원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신선교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이 곧바로 등장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신선교는 기원전 4세기 이전보다 약해진 상태로 오랫동안 한민족의 정신과 삶을 지배했다.
그런데 고대 왕국이 체제 정비를 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사상적 탈바꿈이 일어났다. 그것은 신선교에서 불교로의 전환이었다. 고구려에는 소수림태왕 때인 372년에, 백제에는 침류왕 때인 384년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종교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고대 국가에서는 두 개 이상의 종교가 공존할 수 없었다. 한 나라에 종교가 두 개 있다는 것은 국교가 두 개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모순은 나라를 분열로 빠뜨릴 뿐이었다. 그래서 새로 들어온 불교가 기존의 신선교와 잠시 공존할 수는 있어도 오랫동안 그럴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