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신앙생활 > 신앙생활일반
· ISBN : 9788932813516
· 쪽수 : 226쪽
책 소개
목차
확대개정판 서문
추천의 글_ 신원하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 신념 있는 시민교양 : 신실한 믿음과 공손함은 양립할 수 있는가?
2. 기독교적 시민교양에 대한 오해
3. 기독교적 시민교양의 변호
4.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말하기 : 교양을 갖춘 언어생활의 중요성
5. 열린 마음 : 교양 있는 태도의 중요성
6. 영적인 토대
7. 다원주의의 장점
8. 시민교양과 성(性)
9. 다른 종교의 도전
10. 다원주의 세계에서의 기독교적 리더십
11. ‘다른 한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 시민교양의 한계
12. 지옥은 무례한 개념인가?
13. 아브라함 카이퍼, 테레사 수녀를 만나다 : 승리주의의 문제
14. 느린 하나님을 섬기기 : 시민교양과 종말
후기_ 포옹이 일깨워 준 교훈
주
리뷰
책속에서
이와 같은 최근의 현실을 반영하려고 나는 전반적인 개정 작업을 했으며, 아울러 성에 관한 양극화 현상과 기독교 공동체 내의 여러 이슈들을 다룬 부분, 그리고 타종교에 관한 논의를 상당히 확대했다. 타종교에 관한 논의의 경우는 특히 우리의 일상에 더 가까워진 이슬람의 역할을 고려했다. 그리고 시민교양의 영적인 토대가 예전보다 더 중요해졌다는 확신 가운데 새로운 장을 하나 덧붙였다.
_“확대개정판 서문”에서
마틴 마티가 말한 것처럼, 오늘날의 문제 중 하나는 예의바른 사람은 종종 강한 신념이 없고,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예의가 없다는 점이다. 나는 우리의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 우리는 교양 있는 태도에다가 우리 신념에 대한 ‘강렬한 정열’을 결합할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도전은 신념 있는 시민교양(convicted civility)을 계발하는 일이다.
_1장 “신념 있는 시민교양”에서
그리스도인은 시민교양을 복음 전도를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나 역시 복음주의자로서 이 점을 지적할 때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좋은 소식, 곧 복음을 영접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복음 전도 사역에 상당히 높은 우선순위를 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적 시민교양이 단지 전도의 책략에 불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게할 목적으로 그들을 예의바르게 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_2장 “기독교적 시민교양에 대한 오해”에서
최근에 들어 동성애에 대한 나의 태도가 오늘날 젊은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른 문화적 풍토에서 형성된 것이란 사실을 더 많이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만나는 사적인 모임에서 이 사실을 가슴으로 절감했다. 한 기독교 대학 총장이 동성애 관련 이슈들에 대한 우리의 전형적인 접근이 그 대학의 학생들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문제는 우리 학생들이 그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보다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에게는 그 모든 주제가 아주 개인적인 관계와 얽혀 있다는 사실이죠. 그들에게는 레즈비언인 자매들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어느 날 동성애자임을 선언합니다. 그들에게는 추상적인 신학적 이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_5장 “시민교양과 성”에서
이제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다룰 때가 되었다. 전도가 목적이 아니라면 신과 인간 본성과 구원에 관하여 대화하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가?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무슬림과 영적인 주제에 관해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대화하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그 대화가 이끄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갈 의향이?심지어 내 근본 신념을 바꾸게 될지라도?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어떻게 내가 그 정도까지 동의할 수 있겠는가?
_9장 “다른 종교의 도전”에서
어떤 상황에서는 시민교양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건대 그 기본적인 요건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친절과 온유함을 제쳐 놓을 권리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대적에게 어떤 수단도 불사하는 십자군식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단순한 시민교양을 넘어선다는 것은 교양에 못 미쳐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면 실제 상황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나치와 사탄 숭배자, 합법적 근친상간을 두둔하는 자, 교회 내의 이단들을 어떻게 다루라는 말인가? 그런 사람들을 온유하고 존경하는 자세로 대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_11장 “‘다른 한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서
방금 묘사한 그런 짐작을 추론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은 내게 영적으로 유익한 일이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 복음의 핵심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제대로 ‘받아들였는지’는 물론 하나님이 판단하실 문제다. 어떤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복음의 메시지와 씨름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내 소관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자기의 대적을 어떻게 벌하실지에 대해 많은 시간을 들여 생각하는 것도 건전한 일은 아니다.
_12장. “지옥은 무례한 개념인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