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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88932814179
· 쪽수 : 592쪽
책 소개
목차
서론 19
1장 | 장 칼뱅 신학의 절제된 (종교의) 자유: 제네바에서의 최초 실험
칼뱅의 초기 사상 80
원숙해진 칼뱅의 이론들 102
요약 및 결론 134
2장 | 양심의 의무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행할 자유: 테오도르 베자와 칼뱅주의 권리와 저항 이론의 대두
성 바르톨로메오 날의 대학살 141
베자의 초기 사상 149
새로운 권리 이론의 근원과 발전 172
권한과 자유에 대한 베자의 후기 사상 205
요약 및 결론 224
3장 | 자연권, 인민주권, 언약정치: 요하네스 알투지우스와 네덜란드혁명과 공화제
네덜란드혁명 235
요하네스 알투지우스의 업적 247
자연법, 보통법, 실정법 255
종교적·사회적 권리와 자유 276
사회와 정치 295
요약 및 결론 327
4장 | 자유의 선지자·제사장·왕으로서의 국민: 존 밀턴과 영국인의 권리와 자유
존 밀턴과 영국혁명 353
종교 권리와 자유 361
가정적 권리와 자유 397
시민적 권리와 자유 416
요약 및 결론 434
5장 | 산 위의 도성을 통치하는 법: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자유의 언약
권리와 자유의 기초 446
언약의 자유 461
자유의 약속 470
정치적 자유와 정치규약 | 교회와 국가의 분리 및 협력 | 견제와 균형
미국의 입헌주의와 종교 자유를 배양한 청교도 모판 507
6장 결론: 근대 초기 칼뱅주의 자유의 일대기와 생명작용
오늘날의 법, 종교, 인권 531
책속에서
제이콥 탈몬(J. L. Talmon)은 자신이 저술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기원」(Origins of Totalitarian Democracy, 1952)에서 프랑스혁명이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전조인 동시에 근대 전체주의적 파시즘의 전조라고 묘사했다. 그는 프랑스혁명에서 형성된 ‘변화무쌍’하고 ‘선동적’인 정치사상들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적 파시즘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결과가 생성되었으며, 이런 흐름은 당시 사상가들이 결코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즉, 링컨과 마르크스, 루즈벨트와 무솔리니처럼 서로 다른 인물들이 모두 프랑스혁명의 주요 교훈들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칼뱅주의 종교개혁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이 개신교 운동은 먼저 프랑스의 신학자이며 법학자인 장 칼뱅(1509-1564)의 지도 아래 제네바에서 생성되었고, 이후 250년 동안 프랑스·스코틀랜드·네덜란드·독일·영국·북미의 많은 지역을 휩쓸었다. 칼뱅의 본래 정치사상 역시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등 상반된 두 성향에 널리 영감을 줄 만큼 충분히 ‘변화무쌍’하고 ‘선동적’이었다. 많은 주요 칼뱅주의자들에게 전체주의적 성향을 읽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칼뱅 자신은 물론 테오도르 베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새뮤얼 러더퍼드(Samuel Rutherford), 존 윈스럽, 코튼 매더(Cotton Mather), 그리고 이들의 많은 후계자들에게서 이런 성향을 볼 수 있다. 종교적 신조로 인해 칼뱅주의자들에게 비판, 금지, 감금, 고문, 추방 등을 당하거나 심지어 처형까지 당한 피해자들을 나열하는 것 역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장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장 모렐리(Jean Morely), 야콥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 휴고 그로티우스(Hugo de Groot), 리처드 오버튼(Richard Overton), 존 릴번(John Lilburne),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앤 허친슨(Anne Hutchinson)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근대 초기 유럽과 북미에서 군주제, 노예제도, 남성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 편협주의, 엘리트주의, 탄압 등 각종 부끄러운 형태의 정념과 불공정을 열심히 옹호했던 칼뱅주의 글이나 설교문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법, 종교, 인권에 대한 칼뱅주의 전통을 정직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런 비인간적이고 비인도적인 사실들을 인정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이런 어두운 면을 인정하면서 칼뱅주의의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칼뱅과 그의 신봉자들이 어떻게 인권에 대한 그들만의 독특한 신학과 법학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또 어떻게 이런 권리에 대한 가르침을 근대 초기의 유럽과 미국에서 영구적인 제도적·헌법적 형태로 만들어 냈는지 보여 줄 것이다. 근대 초기 칼뱅주의자들에게 첫 번째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권리는 종교의 권리였으며, 이 권리는 신자 개개인이 누릴 수 있는 양심의 자유(liberty of conscience)와 종교행위의 자유(free exercise of religion), 그리고 종교단체가 누릴 수 있는 예배의 자유(freedom of worship)와 자율통치(autonomy of governance)를 가리킨다. 특히 칼뱅 시대의 개혁가들은 사회에서 종교적 소수자로 탄압과 박해를 받았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종교의 권리를 정당하게 보호받기 위해서는 이와 관련된 다른 권리들도 함께 보호받아야 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개개인이 양심과 종교행위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집회, 표현, 예배, 전도, 교육, 자녀 양육, 여행 등 신앙의 기초가 되는 모든 것에 대한 권리의 보호가 필요했고, 교회 정치의 일환으로서 종교단체가 예배와 자치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법인설립, 공동재산, 집단 예배, 조직적 구제사업, 종교교육, 출판의 자유, 계약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에 대한 권리의 보호가 필요했다. 따라서 근대 초기 칼뱅주의자들에게 종교의 권리는, 게오르크 옐리네크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많은 인권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또한 종교의 권리는 많은 근대 초기 헌법들의 ‘산파’ 역할도 했다. 칼뱅주의자들은 종교 권리와 그외 인권들에 대한 뜻과 기준을 제공하는 헌법 구조와 절차가 없이는 이런 권리들이 사회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음을 힘든 경험을 통해 알았다. 기본적인 보호, 구조, 피난처에 대한 권리가 없는 이들에게는 인권이 별다른 의미를 줄 수 없다. 또 권리를 남용하는 정치관료들과 타 시민들에 대해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인 법정에서의 원고적격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거나, 적절한 법적 보상을 구하기 위한 수단인 소송의 절차적 권리를 가지지 못한 이들 역시 인권과 적절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 나아가 권리의 침해에 대해 부끄러움과 후회, 제재와 존중의 근원을 제시하는 정신과 도덕이 결여된 사회에서는 별다른 인권의 타당성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근대 초기 칼뱅주의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이들과 함께 법의 지배와 모든 평화적인 신자들의 기본권 및 자유의 보호에 주안점을 둔 인권 문화와 헌법 구조를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후략) ___서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