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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스페인/중남미소설
· ISBN : 9788932910321
· 쪽수 : 176쪽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지금 죽어 가고 있건만 아직도 하고픈 말이 너무도 많다. 내 자신과는 평화롭게 지냈는데. 그저 묵묵히 평화를 누렸건만. 그런데 느닷없이 이 일 저 일 떠올랐다. 그놈의 늙다리 청년 탓이다. 나는 평화로웠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평화롭지 않다. 몇 가지는 분명히 밝혀 둬야겠다. 그래서 팔꿈치에 몸을 의지하고, 덜덜 떨리기는 해도 고상한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기억을 낱낱이 더듬어 보련다. 내 자신을 정당화해 줄 행동들을 찾아서. 그놈의 늙다리 청년이 내게 일부러 흠집을 내려고 불과 하룻밤 사이에 퍼뜨린 말을 뒤엎을.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평생 그리 말했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질 도덕적 의무가 있으니까. 심지어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침묵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에게 들리고, 오직 그분만이 침묵을 이해하시고 판단하시니까. 그러니 침묵에도 아주 주의해야 한다. 나는 모든 일에 책임지는 사람이다. 나의 침묵은 티 하나 없다. 다들 분명히 알았으면 한다. 특히 하느님이 분명히 아셨으면 좋겠다. 나머지 사람들이야 무슨 상관이람. 하느님은 상관있으시지만. 내가 지금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가끔씩 팔꿈치에 몸을 의지하고선 깜짝 놀란다니까. 헛소리를 늘어놓다가 잠들고, 내 자신과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가끔 내 이름마저 잊어버리니, 원.
페어웰이 내게 네루다가 어땠는지 물었다. 어떻다니요, 최고의 시인이죠. 내가 답했다. 잠시 우리는 침묵을 지켰다. 페어웰이 두어 발자국 다가서는 바람에 달빛에 비친 그리스 신 같은 그의 늙은 얼굴이 보였다. 내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페어웰이 내 허리를 잠시 잡았다. 이탈리아 시인들의 밤, 야코포네의 밤, 습작생들의 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자네 이탈리아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 보았나? 나는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신학교 시절 자코미노, 피에트로 그리고 본베신의 시를 언뜻 본 적이 있노라고. 그러자 페어웰의 손이 곡괭이에 두 동강 난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 허리에서 철수했다. 미소는 얼굴에서 철수하지 않았지만. 그럼 소르델로는? 무슨 소르델로 말씀이신가요? 음유 시인 말일세. 소르델 혹은 소르델로라고 부르는.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달을 보시게나, 페어웰이 말했다. 나는 달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렇게 말고. 뒤돌아서 쳐다보게. 나는 뒤로 돌아섰다. 등 뒤에서 페어웰이 읊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르델로, 어느 소르델로냐고? 베로나와 트레비소에서 각각 리카르도와 에첼리노와 술을 마신 소르델로, 어느 소르델로냐고?, (그때 페어웰의 손이 다시 내 허리를 누르는 거야!) 라몬 베렌게르와 앙주의 샤를 1세와 말을 달리던 이. 소르델로. 그는 겁이 없었다네, 없었다네, 없었다네.
침묵이 흐른다. 늙다리 청년은 대답이 없다. 멀리서 원숭이 떼가 한꺼번에 지랄 발광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모포에서 한 손을 빼내어 강물에 담그고 이를 노 삼아 침대 방향을 힘겹게 튼다. 인도식 천장 선풍기처럼 네 손가락을 움직여서. 침대가 방향을 틀자 밀림, 본류와 지류들, 이제 회색빛에서 탈피한 눈부시게 푸른 하늘, 바람에 휩쓸려 가는 아이들처럼 내달리는 아주 작고 아스라한 구름 두 점만 보인다. 원숭이들의 수다는 사라졌다. 정말 좋군. 정말 조용해. 정말 평화로워. 또 다른 푸른 하늘을 떠올리기 적당한 평화, 바람에 휩쓸려 서쪽에서 동쪽으로 내달리는 또 다른 작은 구름들을 떠올리기 적당한 평화, 그리고 내 영혼에 일어나는 권태. 노란 거리와 푸른 하늘. 그에 순응하여 도심으로 접근하면 거리는 그 공격적인 노란 색깔을 잃어 가고 보도가 가지런히 깔려 있는 회색빛 거리로 변해 간다. 그 회색빛 바닥을 조금만 파내면 노란색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 점이 내 영혼에 낙담과 권태를 불러일으켰다. 낙담이 권태로 변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다들 알고 있지만 노란 거리와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뿌리 깊은 권태의 시절이 분명히 있었고, 그 시절에 시인으로서의 나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아니 시인으로서의 나의 활동이 위태로운 변화를 겪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