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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중세사(위진남북조~당,송)
· ISBN : 9788946058910
· 쪽수 : 504쪽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서장 효문제의 ‘한화 정책’ 연구사
제1부 효문제의 ‘한화 정책’ 검토
제1장 호어 금지: 북위 후기 낙양 거주 호인의 호어 사용
1. 호어 금지 사료의 검토 | 2. 호어 사용자의 실례 | 보론. 호인의 문서 행정 능력
제2장 호복 착용 금지와 그 한계
1. 북위 후기 호복 금지의 문헌 검토 | 2. 북위 후기 낙양의 호복·한복 병존과 호한 융합의 복식
제3장 호성의 한성 개칭 검토
1. 「조비간묘문」의 호성 표기 | 2. 『위서』의 호성과 한성 표기 검토| 3. 묘지명과 기타 금석문의 호성 표기 | 4. 호성 개칭의 예외 집단
제4장 본적 개칭과 호인의 정체성
1. 호인의 본적 개칭 사례의 검토 | 2. 하남 본적 호인의 정체성
제5장 묘지명의 묘호 표기 검토
1. 효문제의 묘호 변경과 묘지명·『수경주』의 옛 묘호 표기 | 2. 묘호 변경과 표기에 반영된 역사관
제6장 매장 문화와 이장
1. 북위 후기 낙양의 매장 문화 | 2. 호인들의 이장 금지와 낙양 북망산 매장
제7장 중국 예악·제사 도입의 검토: 북위 후기 유가 의례 수용의 허실
1. 조정의 예제 도입의 지체 | 2. 유가 의례 공간의 미완성 | 3. 북위 황실의 ‘이례’와 ‘비례’
소 결 ‘한화 정책’과 ‘호한 잡유’
제2부 북위 후기 낙양의 호속
제8장 북위 후기 낙양 호인들의 생활
1. 낙양 거주 호인의 음식 문화 | 2. 사냥과 활쏘기 | 3. 호풍의 가무와 유희 | 4. 기타 호속
제9장 북위 황실과 호인의 이름
1. 북위 전기 호인들의 이름 | 2. 북위 황실 이름 중복 현상 | 3. 낙양 시대 호어 이름과 불교식 이름
제10장 북위 후기 낙양 호인들의 결혼과 성 풍속
1. 수계혼의 잔존 | 2. 문란한 성생활: 인척 상간, 다처, 간통
제11장 북위 후기 여성의 활동
1. 여성의 투기 현상 | 2. 여성의 정치·사회 활동
제12장 한인 여성의 호화: 호태후
1. 여성의 정치 간여: 황태후와 여주의 이중성 | 2. 호태후의 유가 의례와 예절 무시 | 3. 호태후의 음행: 수계혼과 과부의 ‘문란한’ 성생활 | 4. 외래 종교 불교의 숭상
제3부 호속 유지의 배경
제13장 호속 유지의 정치적 배경
1. 효문제의 잦은 순행·친정과 장기간의 도성 부재 | 2. 낙양 천도의 반발: 목태의 난과 황태자 원순의 평성 도망 미수 사건 | 3. ‘한화 정책’의 예외 조항 | 4. 선무제의 ‘태업’: ‘한화 정책’의 묵살
제14장 호속 유지의 경제적·환경적 배경
1. 유가 예제 건축 미비의 재정적 배경 | 2. 육식과 기사의 원천 하양 목장 | 3. 기후변동: 목축 경계선의 남이
제15장 북변 호인의 호속
1. 북변 호인들의 언어 | 2. 북변 호인들의 생활 풍속 | 3. 안신과 낙양 호속
16장 제3의 문화: 서역 문화
1. 북위 평성 시대의 서역인과 서역 문화 | 2. 낙양의 서역 상인과 교역 | 3. 낙양의 서역 음악과 무용, 서커스, 마술 | 4. 낙양의 서역 불교와 서역 불교예술 | 5. 국제도시 낙양 속의 서역인과 서역 문화
종장 북위 후기 낙양 사회: 문화의 샐러드 볼
역대 이민족 왕조와 북위의 동화론 신화와 호속 유지 | 『위서』의 편향성과 한화 위주의 서술 | 성족 분정과 통혼, 남은 과제
각 장의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북위 낙양 시대의 이름은 한자의 뜻을 살린 중국식 이름, 호어 이름을 약칭하거나 그대로 사용한 호어 이름,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인물과 개념 등 각종 인도어를 차용한 이름이 공존했다. 따라서 중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자 이름만으로 ‘인명의 한화’를 주장하는 것은 당시 현실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주장이다. 게다가 ‘인명의 한화’ 주장은 효문제의 ‘한화 정책’ 가운데 한자를 사용해 중국식으로 이름을 지으라는 명령이나 조치가 없었음을 간과한 것이다. 도리어 이름 짓는 방식을 보면 호인들은 자신의 고유한 이름이나 인도라는 외래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명의 한화’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인명에도 호속의 영향이 여전히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_ 제9장 북위 황실과 호인의 이름
서역 문화는 호인(유목민)들이 한인과 한문화에 일방적으로 경도되는 것을 막는 완충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인뿐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민, 고구려 등 만주와 한반도의 사람들, 남조에서 귀화한 사람들, 중앙아시아와 인도, 페르시아 등 서역 사람들이 낙양에 거주했고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들에게 자신의 문화를 퍼뜨렸다. 따라서 북위의 호인 지배층이 일방적으로 한문화만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족의 문화를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낙양이었다. _ 제16장제3의 문화
호태후는 유가 문화의 세례를 받은 ‘정숙한 한인 여성’이 아니라 각종 호속을 따른 ‘호화된 한인’이었다. 호태후는 임조칭제를 하는 태후를 넘어 황제처럼 행동했고, 아들 효명제 대신 제사를 주관했으며 유가 의례와 예절을 무시했다. 또한 과부인 호태후는 남편 선무제의 동생 청하왕 원역, 정엄, 이신궤, 양화 등과 정을 통했다. 『위서』 「천상지」에서도 호태후의 음란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 호태후의 활동을 살펴보면 한인 여성으로 북위 황실을 ‘한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화’되었다. 호태후는 북위 낙양 시대 호속을 수용한 한인의 전형적인 예로 주목된다. 또한 호태후의 호속 감염은 북위 황실이 여전히 호속을 유지했음을 반증한다. _ 종장 북위 후기 낙양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