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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여행에세이 > 해외여행에세이
· ISBN : 9788952767783
· 쪽수 : 456쪽
책 소개
목차
네이선 로드 36-44 청킹맨션
중국을 향해 일보 전진
진장호에서의 나날
하늘을 수놓은 불꽃
환상의 선실 댄스 파티
조니의 고향
만리장성에서 건배를
그린 로터스 피크 인
클레어, 클레어!
공포의 새벽 심문
강물은 클레어에게 손짓하고
40시간 동안의 귀환
리뷰
책속에서
자, 여행 경험이 전무한 여자 둘이 비행기 이코노미석(흡연석에서 겨우 두 줄 떨어진 곳)에 앉아 서른한 시간을 날아서 낯선 나라에 막 도착했다. 시차 때문에 둘 다 밤낮이 뒤바뀌어 해롱대는 중이고, 둘 다 엄청 지저분하다. 하루가 넘게 샤워를 못 했고, 기내에서 받은 공짜 프레첼이 이 사이에 껴 있다. 기내의 건조한 공기로 숨 쉬고, 손바닥만 한 스크린으로 영화 <구니스>와 드라마 <페리스의 해방>을 돌려본 탓에 머리가 빠개질 듯 아프다. 게다가 한 명은 방금 코피를 펑펑 쏟아냈다. 공항 밖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습하고 뜨거운 공기와 부딪히면서 시내버스 가스배출구에 코를 들이민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렇다면 ‘홀리데이 인’에 방을 하나 잡아서 이틀 정도 적응할 시간을 갖는 게 장땡이다.
그러나 클레어와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현지 분위기에 몸을 던지기로 작정한 우리가 아니던가.
“우린 ‘여행자’가 돼야 해. 팔자 좋게 돈 지랄이나 떠는 관광객이 아니라.” 그해 여름 그녀가 전화통을 붙들고 수없이 되뇌던 말이었다. “에어컨 빵빵한 버스도 안 되고, 관광 가이드를 따라도 안 되고, 힐튼 호텔도 안 돼.”
“당연하지.” 나도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선을 손에 감고 배배 꼬아대며. “이번 여행의 목적은 ‘진짜’ 세계를 경험하는 거라고. 남들 다 가는 길은 피해야 해. 현지인들이 자는 곳에서 자고, 현지인들이 먹는 것만 먹자고. 그곳의 핵심으로 파고 들어가는 거야. 진정한 현지인으로 녹아들어야지.”
_ ‘네이선 로드 36-44 청킹맨션’ 中에서
클레어와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서양인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중국의 어느 마을에 가게 된 것만으로도 경이로운데 동양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우리만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주다니!
우리는 조니에게 애걸했다. “감동과 고마움의 표시를 하고 싶어요. 어떡하면 될지 꼭 좀 물어봐 줘요.”
경극 가수는 모자를 벗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조니의 귀에 대고 뭔가를 수줍게 속삭였다.
조니가 싱긋 웃었다. “유럽에 갔을 때, 텔레비전에 나온 미국 가수가 무척 멋있었대요. 그 가수처럼 춤추는 법을 가르쳐주시면 좋겠다고 하시네요. 가수 이름은 ‘마이클 잭슨’이래요.”
“마이클 잭슨?”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 농담이시죠?”
클레어가 배낭을 뒤적이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테이프를 하나 꺼내 조니의 카세트에 밀어넣었다. “오, 진짜 죽여줄 거예요.”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며 “너도 마음에 들 거야. 우리의 파바로티님께 엉덩이 흔드는 법을 가르쳐드리라고!”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마이클 잭슨처럼 춤추는 법을 가르치라니. 하지만 청소년기의 주말 밤을 거의 댄스클럽에서 보낸 것도 나름의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나는 겁도 없이 중국의 경극 스타에게 다가가 손을 덥석 잡았다. 좁디좁은 선실 안에서, 나는 그를 광란의 댄스파티로 이끌었다. 잭슨 파이브의 에 맞춰 온몸을 흔들고, 프린스의 <1999>에 맞춰 빙글빙글 돌았다. 팔코의
마침내 테이프에 담긴 음악이 모두 끝나고 우리 둘은 사정없이 헐떡거렸다. 경극 가수가 나에게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건넸다.
“셰셰 니.” 나 역시 허리 굽혀 인사했다.
_ ‘환상의 선실 댄스 파티’ 中에서
차가운 물속에 꽤 오래 있었던 탓에 근육은 오그라들고 발은 감각을 잃었다. 기를 쓰며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보려 하지만, 그녀는 모래 함정에 빠진 개미나 다름없는 신세다. 그녀의 기력은 점점 소진되는데 힘센 강물은 사정없이 그녀를 하류로 끌어당긴다. 그녀는 넘어지지 않으려 사투를 벌인다. 팔을 하도 휘저어 어깨가 빠질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포기하자. 애쓸 필요 없잖아. 그럼 편해질 거야. 너무 많은 걸 짊어지며 여기까지 왔어. 그냥 다 놓아버리자. 뭐 어때?
강물이 넘실대며 속삭인다. 그래, 잘 생각했어. 내게로 와, 이젠 내가 널 짊어질 테니.
클레어는 팔을 벌리고 발로 강바닥을 차며 몸을 뒤로 누인다. 강물은 불쑥 솟아올라 그녀와 조우하고, 잠시 그녀를 받쳐주다가, 이내 그녀를 덮쳐버린다. 세찬 물살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회전폭죽처럼 휘돌아간다. 귀와 코로 물이 들어온다. 강물은 점점 더 빨라지고 점점 더 난폭해진다. 숨이 막히고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는 생각한다. 이런 거구나, 물에 빠져 죽는 거. 바로 그때 섬뜩하게 우두둑, 우지끈 하고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가 얼굴을 후려치고 왼쪽 상반신을 훑으며 강바닥에 꽂힌다. 폭풍에 쓰러진 나무다. 클레어는 거인의 손가락 같은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더는 휩쓸려 내려가지 않는다. 나무를 붙들고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킨 그녀의 시야로 강둑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두 명의 사람이 잡힌다. 하지만 그들은 CIA 요원이나 모사드 저격수가 아니다. 허름한 바지에 밀짚모자를 쓴 중국인 꼬마 둘이다. 깜짝 놀란 아이들은 찌그러진 양동이를 양팔로 부둥켜안고 있다.
_ ‘강물은 클레어에게 손짓하고’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