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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52769206
· 쪽수 : 293쪽
책 소개
목차
1부
2부
3부
해설. 두더지의 고독, 소설의 윤리_ 서동진
트루먼 커포티 연보
리뷰
책속에서
“나도 안다면야…….” 랜돌프는 말을 멈추고 성냥을 들어 초에 가져다 댔다. 갑작스레 빛이 비치자 얼굴이 더 근사하게 보였다. 털이 없는 분홍색 피부는 흠 하나 없이 젊어 보였다. “하지만, 아가, 몇 가지는 충족되었지. 불완전한 에피소드 없는 삶이 얼마나 있겠니? ‘우리는 어둠 속에서 일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가진 것을 준다. 우리의 의무는 우리의 정열이며, 우리의 의무는 우리의 일이다…….’ 끝을 알고 싶어서 우리는 신을 믿게 되지. 아니면 마녀를 믿든가. 적어도 뭔가 믿게 돼.”
그는 포도주를 구강청정제처럼 입을 헹구듯이 마셨다.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조엘은 빈 단지를 개미를 가두는 용도로 썼다. 신실한 곤충이라고, 랜돌프는 불렀다. “개미 떼를 볼 때마다 나는 무척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우울해지곤 해. 그처럼 독실한 근면성으로 무념무상 행진하는 청교도적 정신이 감탄스럽지만,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정부가 일반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을 노래한 시를 인정할 수 있겠니? 분명히 자기 빵 부스러기를 나르지 않겠다고 하는 개인은 뒤에서 칼침을 맞고 미소 속에서 파멸을 맞겠지. 나로서는 고독한 두더지 쪽이 좋구나. 두더지는 가시와 뿌리에 의존하는 장미가 아니야. 또 존재의 시간이 절대로 바뀌지 않는 무리에 의해 조직되는 개미도 아니지. 두더지는 보이지 않는 채로 자기의 길을 가는 거야. 진실과 자유는 정신의 태도임을 알고서.” 랜돌프는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펴고 웃었다. 자기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두더지만큼 현명했다면, 내가 자유롭고 평등했다면, 나는 정말 훌륭한 유곽의 포주가 되었을 거야. 하지만 아마도 특별하지만 평범한 여자로 인생 종 쳤을 가능성이 많겠지. 코르셋도 입지 않는 땅딸막한 아줌마가 되어 돌머리 남편이랑 망나니 애새끼들을 데리고 스튜나 끓이고 살았을걸.” 그 순간 마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 개미 한 마리가 허둥지둥 랜돌프의 목을 타고 올라 귓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머리 속으로 개미가 들어갔어요.” 조엘이 말했지만 랜돌프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조엘은 랜돌프에게로 기어가 될 수 있는 한 예의 바르게 귓속을 들여다보았다. 개미가 인간의 머리 속에서 헤엄친다는 생각을 하니 짜릿한 전율이 일어 조엘은 한참 지난 후에야 침묵을 알아챘다. 랜돌프의 눈빛에 길게 늘어진 긴장이 담긴 물음이 있다는 것도. 그 표정에 조엘은 불가사의하게도 소름이 끼쳤다. “개미를 찾고 있었어요.” 조엘이 말했다. “귀 안으로 들어갔길래. 위험할 수도 있잖아요. 핀을 삼킨 거나 비슷하게.”
“아니면 패배인 거지.” 체념의 의미인지, 랜돌프의 얼굴에 설탕같이 달콤한 주름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