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자락의 그림자까지 그림자에 스민 숨결까지

책을 펴내며

야생의 기억
드러내는 미학과 숨기는 미학
먹빛에 어른거리는 역사의 먼 곳
옷자락의 그림자까지 그림자에 스민 숨결까지
아직 못다 한 이야기

도판목록

그런 맥락에서 보면, 아무래도 그는 이번 작품들에서 유목문명을 다루거나 유목민의 역사 혹은 고구려인들의 기상 같은 것을 살리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 야심을 탐냈던 것 같지는 않다. 유목민의 대지에 김호석이 다녀오고 또 내가 가고, 뒤이어 꽤 여러 명의 예술가들이 비슷한 풍경을 보고 왔지만, 아무도 이번에 김호석이 보여준 것 같은, 생명에 대한 특유의 감수성을 보여준 바가 없었다. 대부분의 관심이 '유목민' '역사' '문명' 등에 치우쳤던 반면, 그는 생명 내부의 문제들이 집착하고 있다. - 본문 34쪽에서

이렇게 세상은 어지럽고 시는 안 되고 마음만 팍팍하던 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난세를 이겨가는 예술가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이름은 김호석이라고, 수묵을 하는 호남 사람인데 그는 내게 묵향을 풍기는 화가라거나 정치색을 함께 가진 동향인으로서가 아니라 크나큰 시적 충격을 가하는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것이 그림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들에게서나 그 그림에 대한 학문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서 과연 얼마만한 값어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알다시피 나는 수묵을 모르는 무명의 시인이었던 것이다. - 본문 152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