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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2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은이), 송태욱 (옮긴이),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2011-11-03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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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2

책 정보

· 제목 : 십자군 이야기 2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서양사 > 서양중세사
· ISBN : 9788954615211
· 쪽수 : 344쪽

책 소개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십자군 전쟁에서 역사가들은 광기와 사망자 숫자, 증오와 원한에 찬 비극의 기원을 발견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만들어낸 장대한 드라마를 발견하고, 그 빛과 어둠 속에서 매혹적인 인간 군상의 스토리를 압도적으로 그려낸다.

목차

제1장 | 수호의 시대
십자군의 제2세대
템플 기사단의 탄생
성 요한 기사단의 변모
보두앵 2세
십자군의 여자들
프랑스에서 온 예루살렘 왕
성채

제2장 | 이슬람의 반격이 시작되다
에데사 함락
수도사 베르나르두스
제2차 십자군
성지로 가는 길
다마스쿠스로
철수
심각한 영향
누레딘의 등장
십자군 국가의 실태
대지진
비잔틴식 외교
해군력=제해권
십자군과 십자군 사이의 시기
종교 기사단
‘템플 기사단’
‘병원 기사단’
십자군 시대의 성채
중세의 경제인들
해군력
거류지
상관
온건한 이슬람교도

제3장 | 살라딘의 등장
수니파와 시아파
파티마 왕조의 멸망
새로운 십자군의 계획과 좌절
젊은 살라딘
문둥이 왕 보두앵
이슬람 세계 통일로 가는 긴 도정
젊은 문둥이 왕의 끝없는 싸움
‘해시시를 피우는 남자들’
‘고삐 풀린 개’

제4장 | 성전(지하드)의 해
‘하틴 전투’
승자와 패자
발리앙 이벨린
예루살렘 공방
남자의 대결
예루살렘, 다시 이슬람의 손으로

도판 출처

저자소개

시오노 나나미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37년 7월 7일 도쿄에서 태어나 가쿠슈인 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뒤 이듬해인 19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어떤 공식교육기관에도 적을 두지 않고 혼자서 공부했다. 서양문명의 모태인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역사현장을 발로 취재하며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로마사에 천착하고 있는 그는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는 도전적 역사해석과 소설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놀라운 필력으로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2002년 이탈리아의 국가훈장인 국가공로상을 받았고, 200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 작품으로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비롯하여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1970년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바다의 도시 이야기』(1982년 산토리 학예상)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1988년 여류문학상) 『신의 대리인』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그리고 그의 필생의 역작인 『로마인 이야기』(1993년 신조학예상, 1999년 시바 료타로상)가 있다. 이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는 1992년에 제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를 시작으로 15년 동안 매년 한 권씩 집필하여 2006년 마침내 제15권 ‘로마 세계의 종언’을 끝으로 기나긴 대장정을 끝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충돌을 서술한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상·하)를 최근 펴냈다. 그밖에 『침묵하는 소수』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사랑의 풍경』 『살로메 유모 이야기』 『이탈리아에서 온 편지』(1·2)등의 에세이와 『어부 마르코의 꿈』 『콘스탄티노플의 뱃사공』 등의 삽화소설이 있으며, 영화감독을 꿈꾸는 아들과의 대화를 담은 『로마에서 말하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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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욱 (옮긴이)    정보 더보기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외국어대학 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미야모토 데루의 『환상의 빛』 『금수』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를 비롯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마음』 등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지은 책으로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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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구 (감수)    정보 더보기
서양중세사 전공자로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서양의 접경을 연구하는 중앙대·한국외대 HK+ 접경인문학연구단의 단장을 역임했고,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은 『로마제국 사라지고 마르탱 게르 귀향하다: 영화로 읽는 서양 중세 이야기』, 『중세 유럽 여성의 발견: 이브의 딸 성녀가 되다』, 『남자의 품격: 중세의 기사는 어떻게 남자로 만들어졌는가』, 『국경의 역사: 국경 경관론적 접근』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교황의 역사: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근대 유럽을 만든 중세의 모든 순간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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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십자군의 여자들

(…)
널리 인간세계에 눈을 돌리면 인재가 마치 분수처럼 한 시대에 한꺼번에 배출되는 현상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역시 분수처럼 많은 물을 기세 좋게 뿜어올리고는 소리 없이 떨어지며 인재 고갈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런 현상이 끼치는 영향이 국내에만 한정된다면 문제해결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전 시대에 축적해놓은 것을 갉아먹으며 차분히 앉아 다음 분수가 뿜어져오르기를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세계에서는 한 나라의 인재 배출과 인재 고갈의 순환이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시기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한쪽은 인재 고갈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인재 배출의 시대를 맞이하는 일이 상당한 비율로 일어나는 것이 인간세계이다.

유럽을 떠난 1096년부터 1099년 예루살렘 정복을 거쳐 보두앵 1세가 죽은 1118년까지의 22년은, 십자군측에서 인재가 배출된 시대였다.

연구자들은 제1차 십자군의 성공요인으로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허를 찔린 이슬람측에 방어준비가 불충분했다는 것.
또 하나는, 각 영지의 태수와 영주 사이의 불화와, 그에 따른 이슬람측의 분열.

둘 다 옳다. 십자군의 공격을 받은 이슬람측은 그들을 단순한 침략자로 생각했으므로 평소 사이가 나쁜 인근 도시의 영주가 공격받는 것을 손놓고 지켜보기만 했고, 자신이 공격을 받아 맞서 싸우게 되면 이번에는 다른 영주들이 가만히 지켜보는 식이었다. 이렇듯 그들에게 통일된 방어전 같은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는데, 이는 제1차 십자군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말할 게 있다. 뛰어난 인재에게 요구되는 조건이 일관된 의지와 자신이 지닌 힘을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라면, 제1차 십자군 시대의 이슬람측에는 그런 인재가 없었다. 이슬람측에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 십자군측에 성공을 가져다준 것이다.

인재가 많았던 제1차 십자군 시대가 끝난 후 공식무대에 등장한 것이 3대 예루살렘 왕이 된 보두앵 2세다. 하지만 이 사람은 1096년에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를 따라 오리엔트로 온 십자군 기사 중 하나였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제1차 십자군 세대 중 아직 남아 있는 사람에 속한다. 또한 조슬랭 드 쿠르트네라는 맹우가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다. 이 보두앵 2세의 시대에는, 그 높이와 기세는 뚝 떨어졌을지언정 분수가 아직 물을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군이 유럽을 떠나던 해에 겨우 다섯 살이었고, 그후 30년 넘게 프랑스 왕가의 일원으로 지낸 사람이 예루살렘 왕이 되었을 때, 분수는 물을 내뿜기를 멈추었다. 그런데 이슬람측에서는 이 시기부터 물을 높이 뿜어올리게 된다. 역사의 불가사의, 하지만 이것은 인간세계의 부조리이기도 하다.


수도사 베르나르두스

중근동의 십자군 국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에데사 백작령, 안티오키아 공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령 네 국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적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맞닥뜨린 그리스도교도들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 강하게, 이제 신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 것인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런 공포는 한 나라의 왕이든 일개 서민이든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에 수도사 베르나르두스의 목소리가 한층 높이 울려퍼졌다. 제1차 십자군은 클뤼니 수도원 관계자들의 호소로 시작되었는데, 제2차 십자군은 클뤼니파의 그리스도교 세계 개혁안을 미온적이라 비판하며 설립된, 프랑스의 수도회에서도 보다 급진적인 성향을 띤 시토파 수도원 관계자들에 의해 일어나게 된다.
후에 가톨릭교회의 성인 반열에 올라 ‘성 베르나르두스’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이 사람은 1090년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 지방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에서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한 사람이 많았는데, 베르나르두스는 오리엔트를 향해 떠나는 그리스도 전사들의 긴 행렬을 여섯 살 무렵에 본 셈이다.
(…)
중세 유럽은 ‘수도원의 시대’라고도 불린다. 수도원이 세속 사람들에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성 베네딕투스가 이탈리아 남부의 몬테 카시노에 창설한 이래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베네딕토파 수도원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클뤼니 수도원도 베네딕토파에 속하므로, 창시자인 성 베네딕투스가 정한 수도원의 기본원칙, 청빈과 복종과 정결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십자군 성공의 공로를 대접받게 된 후 클뤼니 수도원에 모여든 것은 사람들의 신앙심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기부도 급증한 것이다. 이 시기 프랑스 남부를 휩쓸던 북아프리카 해적이 로마를 향해 여행중이던 클뤼니 수도원 원장 일행을 습격하여 엄청난 수확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클뤼니 수도원 고위 사제들의 사치스러움은 로마 교황을 능가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 한 가지만 가지고 클뤼니 수도원을 비난했다면 베르나르두스는 고지식한 원리주의자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원리주의자 중에서도 과격한 원리주의자였다. 자기 혼자만 원리원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인다는 의미에서.

베네딕토파 수도원에는 앞서 말한 3대 원칙 외에 라틴어로 ‘스타빌리타스(정주)’라 불리는 규칙도 있었다. 베르나르두스는 청빈 같은 것보다 특히 이 규칙을 싫어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베네딕토가 생각한 ‘정주’는 세상의 잡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며, 신에게 가까이 가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수도사 베르나르두스는 성직자가 세상의 잡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 세계를 성서의 뜻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인간세계에서는 소리 높여 주장하면 할수록 대중의 이목을 끌기 쉽다. 베르나르두스에게 심취한 사람이 늘고 베르나르두스파 수도원에 들어오는 기부도 늘어만 갔다. 유럽은 클뤼니파 대신 베르나르두스가 이끄는 시토파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1144년 말에 일어난 에데사 함락 소식이 아직 유럽에 전해지지 않았던 1145년 2월 초, 베르나르두스에게 심취했던 사람 중 하나가 에우게니우스 3세라는 이름으로 로마 교황에 취임한다.

제자의 교황 취임을 축하하며 보낸 편지에서, 성직계의 최하위층에 속하는 이 수도사는 최상위에 있는 로마 교황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슨 문제든 나와 상담해주시오.”
이것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가 가지고 있던 ‘힘’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원동력은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였지만, 베르나르두스는 교황이 아니다. 대주교도 주교도 아니었다. 세상에서는 한낱 수도사에 지나지 않던 이 사람이 제2차 십자군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
당시 기록에서는 이런 베르나르두스를 홀쭉하게 여윈 몸을 허름한 수도복으로 감싸고 지팡이에 의지해 휘청휘청 걸어다녔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빈약하고 허약한 외모는, 영양이 충분한 몸에 옷을 몇 겹씩 껴입은 황제나 왕과 대면하는 순간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당시의 권력자들은 베르나르두스의 이런 외모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호화로운 옷을 껴입은 몸을 부끄럽게 여길 것까진 없더라도 왠지 모를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리고 뒤이어 그리스도교도라면 누구에게나 마땅한 정론이 날카롭게 설파된다. 이래서야 설득당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종교 기사단

(…) 신에게 평생을 바친 수도사이자 신을 위해 싸우는 기사이기도 한 남자들을 결집한 종교 기사단은 십자군 시대의 특산물이다.
이들의 대표격을 꼽는다면 당시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라고 부르던 중근동을 본거지로 하고 이 성지를 지키기 위해 창설된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을 들 수 있다.
(…)
중근동의 십자군 국가에서 생겨난 양대 종교 기사단인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 역시 세속의 삶을 버리고 수도사가 된 남자들의 집단이다. 유럽에 있는 동종의 수도회와 다른 점은 오직 한 가지, 이슬람 교도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이 양대 종교 기사단은 본부를 예루살렘에 두었음에도 예루살렘의 대주교가 내리는 명령도, 예루살렘 왕의 명령도 따를 필요가 없었다. 사실상 완전히 독립된 집단이었다. 이와 관련해 누레딘이 이끄는 다마스쿠스군이 접근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이 어떻게 움직였을지 상상해보자.

예루살렘 왕과 공동으로 싸워야 할지 말지 로마 교황에게 지시를 받고 싶어도 그 전에 당장 행동을 개시하지 않으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것이 그들이 처한 상황이었다. 자주적으로 판단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독립성 덕분에 종교 기사단은 수세로 돌아선 십자군 국가의 ‘칼’이 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칼을 빼지 않고 차고 있는 것만으로도 억지력이 된다. 하지만 난세에는 유사시에 주저 없이 칼을 빼지 않으면 곧장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십자군 국가의 두 자루 ‘칼’인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이 전투 집단으로 창설된 시기는 1118년이다. 1118년은 제1차 십자군 세대의 마지막 인물인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가 죽은 해이고, 그때까지 20년 동안 확립한 십자군 국가들이 수세로 돌아서는 경계가 된 해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주는 것처럼, 종교 기사단은 수세로 돌아선 시대의 중근동 십자군 세력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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