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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88956253534
· 쪽수 : 448쪽
책 소개
목차
하는 말
눈보라 / 언 강 / 푸른 연기 / 뱃사공 / 대장장이 / 겨울비 / 봉우리 / 말먹이 풀 / 초가지붕 / 계집아이 / 똥 / 바늘 / 머리 하나 / 웃으면서 곡하기 / 돌멩이 / 사다리 / 밴댕이젓 / 소문 / 길 / 말먼지 / 망월봉 / 돼지기름 / 격서 / 온조의 나라 / 쇠고기 / 붉은 눈 / 설날 / 냉이 / 물비늘 / 이 잡기 / 답서 / 문장가 / 역적 / 빛가루 / 홍이포 / 반란 / 출성 / 두 신하 / 흙냄새 / 성 안의 봄
못다 한 말
부록
― 남한산성 지도 / 남한산성 지도 설명 / 대륙, 명에서 청으로 / 남한산성, 겨울에서 봄으로 / 낱말풀이
참고문헌
리뷰
책속에서
말[言]의 길은 마음속으로 뻗어 있고, 삶의 길은 땅 위로 뻗어 있다.
삶은 말을 온전히 짊어지고 갈 수 없고 말이 삶을 모두 감당해낼 수도 없다.
말의 길과 삶의 길을 이으려는 인간의 길은 흔히 고통과 시련 속으로 뻗어 있다. 이 길은 전인미답이고, 우회로가 없다.
임금은 성안으로 쫓겨 들어왔다가 끌려나갔고, 폐허의 봄에 냉이가 돋았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그 성안에 모여들어서 봄 농사를 준비하고 나루가 초경을 흘리는 대목으로 내 소설은 끝났다. 나는 정축년(1637년)의 봄을 단지 자연의 순환에 따른 일상의 풍경으로 묘사했다. 이념의 좌표가 없는, 진부한 결말이지만 억지로 몰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일상의 구체성 안에서 구현될 수 없는 사상의 지표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고립무원의 성안에서 많은 언어와 지표들이 뒤엉켰는데, 말, 그 지향성 안에는 길이 없었고, 말의 길을 이 세상의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곳에서 걸어갈 수 있는 길은 겨우 생겨났다. 그 길은 산성 서문에서 삼전나루, 수항단으로 이어지는 하산의 길이었다. 그 길은 문명의 흔적이 없는 황무지를 건너가는 길이었고, 아무도 디딘 적이 없는 땅에 몸을 갈면서 나아가야 하는 길이었다. 저 가엾은 임금은 이 하산의 길을 걸어 내려가면서 비로소 고해의 아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리막길에는 눈이 얼어 있었고 말이 미끄러졌다. 나는 이 아비를 사랑한다. 미워하지 않는다.
고립무원의 성안에서, 많은 말들이 피를 튀기며 부딪쳤으나, 더 많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그 겨울을 보냈다. 나는 그들의 침묵에 관하여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침묵하는 사람들의 내면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침묵 속에는 더 절박한 언어들이 들끓고 있을 테지만, 나는 나의 언어로 그 침묵 속의 언어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이 침묵에 관한 한 나의 소설은 미완성의 습작이다.
― 「못다 한 말」 가운데 '말, 길 그리고 침묵'에서.
지금 한강은 상류가 댐으로 막히고 양쪽 유역이 강변도로로 막혀 있다. 도심의 한강은 굽이쳐서 유역을 적시지 못하고,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온순하게 엎드려 있다.
행주대교를 지나면서 한강은 자유파행의 흐름을 회복한다. 강은 넓은 습지를 펼치면서 굽이치는데, 그 아래쪽 하구는 군사분계선으로 막혀 있다. 큰 강은 적막해서 새소리가 멀리까지 들리고, 고깃배 한 척도 얼씬 못하는 하구에 바닷물이 드나들고 물고기가 들끓는다. 김포 북단 조강나루에서 바라보면 강 건너 북쪽 조강리가 아지랑이 속에서 흔들려 보인다. 갈 수 없는 대안의 기슭은 이처럼 가까웠다. 이 세계가 영원히 불완전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사랑과 언어는 이 불완전성의 소산이다.
― 「못다 한 말」 가운데 '하구에서'에서.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