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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문화/역사기행 > 동서양 문화/역사기행
· ISBN : 9788958451228
· 쪽수 : 400쪽
책 소개
목차
상권
1. 마이산
2. 압록강
3. 마시촌
4. 구련성
5. 금석산에서 총수까지
6. 봉황산
7. 책문
8. 고구려 오골성
9. 봉황성
10. 송참
11. 통원보
12. 초하구에서 회령령까지
13. 첨수참
14. 청석령
15. 낭자산
16. 석문령에서 아미장까지
17. 백탑·광우사
18. 태자하
19. 영수사
20. 난니보에서 십리하까지
21. 백탑보에서 심양까지
22. 심양성
23. 복릉·소릉
24. 중산광장
25. 실승사
26. 탑원
27. 영안교에서 고가자까지
28. 거류하보
29. 신민에서 일판문까지
30. 이도정을 지나 신점까지
31. 신점의 갈림길과 소흑산
32. 광녕성
33. 북진묘
34. 의무려산도화동
35. 관음동
36. 「열하일기」 7월 15일자 기록
37. 십삼산
38. 사동비
39. 송산·행산
40. 고교보
41. 탑산·청돈대
42. 영원성
43. 중후소
44. 삼대자
45. 석교하
46. 중전소
47. 강녀묘
48. 장대
49. 산해관
50. 징해루·각산
51. 무령현
52. 영평부
53. 사호석
54. 이제묘
55. 야계타·사하역
56. 진자점
57. 풍윤
58. 고려보
59. 옥전현
60. 채정교에서 송가장까지
61. 계주 독락사
62. 청동릉
63. 반산
64. 방균점에서 연교보까지
65. 노하
66. 팔리교를 지나
하권
1. 동악묘
2. 조양문
3. 북경성
4. 옥하관·남관
5. 서관
6. 습례정
7. 조회
8. 사직단
9. 동화문
10. 전성문 일대
11. 체인각
12. 김흑의 자금성
13. 진비정
14. 만세산
15. 태액지
16. 중난하이
17. 미량쿠후통
18. 덕승문
19. 정양문
20. 유리창
21. 간졍동
22. 기효람기념관
23. 창춘원
24. 원명원
25. 서산
26. 만수사
27. 진각사
28. 문승상사
29. 국자감
30. 공묘
31. 옹화궁
32. 회자관
33. 천주당
34. 이마두총
35. 결정모방
36. 천단
37. 금어지
38. 백운관
39. 법원사
40. 관상대
41. 융복사
42. 막북행정
43. 밀운
44. 목가곡에서 남천문까지
45. 고북구성 남문
46. 고북구
47. 삼중으로 된 관문
48. 삼간방에서 왕가영까지
49. 하둔·쌍탑산
50. 열하
51. 열하문묘
52. 태학관
53. 관제묘
54. 내오문 일대
55. 청음각 일대
56. 만수원
57. 열하의 거리풍경
58. 찰십륜포
저자소개
책속에서
청나라 때 연행을 하던 조선의 선비들치고 송산·행산·탑산 등지의 옛 전쟁터를 지나며 무심히 지나간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또한, 이곳을 지나던 조선 선비들은 거의 다 명나라의 패전을 애석해하는 감회를 표현했다. 청나라의 북경 천도 이후 연행을 한 몇 사람의 기록들 가운데 한 대목씩을 뽑아 아래에 옮겨본다. 인평대군 등의 기록은 명나라를 위해 애석해하는 내용들이지만 박지원의 기록은 한 걸음 물러나 조금은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본 느낌을 준다.
이 싸움에 청주(淸主)가 우리나라 수천 명 정예한 포병을 징집해다가 4~5년 동안 교체해가며 수자리를 살리니, 모두 사격술에 능했다. 명나라 군사가 공을 논하는데 오랑캐의 머리는 50금(金), 고려 사람의 머리는 그 배를 주었다. 우리나라 장졸들은 비록 청인의 위령(威令)에 겁이 나서 부끄러움을 머금고 적에게 나갔다고 하지만, 국가에서 수백 년 동안 양병을 한 것이 마땅히 써야 할 때에는 쓰지 못하고, 도리어 쓰지 못할 자리에 썼으니,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인평대군)
이 지역이 병화를 입은 지 이미 70년이 지났는데, 민물(民物)이 모두 조폐(凋弊)한 채 지금껏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연대(煙臺)는 곳곳이 파괴되어 벽돌 조각도 남지 않았으니, 비참했던 당시의 도륙상을 생각할 때 가슴이 쓰렸다. (김창업)
송산보와 행산보의 두 보는 명나라 때의 큰 전쟁터인데 명나라가 이 땅을 잃은 뒤로부터 청나라가 마치 자리를 말아 들어가듯 승승장구하여, 명나라는 도처에서 와해되어 버렸다. 이것도 하늘의 뜻이거니 다만 슬픔만 간절할 뿐이다. (이갑)
송산에서부터 행산 고교보(高橋堡)를 지나 탑산(塔山)에 이르기까지 백여리 사이에는 비록 마을과 가게가 있기는 하나 가난하고 쇠잔하여, 도무지 생업을 즐겨 힘쓸 마음이 없어 보인다. 아! 여기가 숭정(崇禎) 경진(庚辰 1640)·신사(辛巳 1641)년에 온통 피바다를 이룬 곳이구나. 벌써 백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회복되지 못했으니, 넉넉히 당시의 용호(龍虎)가 얼마나 격렬하게 싸웠던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박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