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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라이트 노벨 > 앨리스 노벨
· ISBN : 9788960525399
· 쪽수 : 274쪽
책 소개
목차
[서장] 운명의 신부
[제1장] 재회
[제2장] 의식
[제3장] 자유
[제4장] 내방
[제5장] 충돌
[제6장] 상애(相愛)
[종장] 행복한 신부
작가 후기
역자 후기
책속에서
이제 뒤로 물러날 수 없다.
살갗을 미끄러지는 매끈한 비단의 감촉과 옷이 스치는 소리에 자연스레 각오가 굳었다. 준비가 되어 가고 있음을 자신의 살갗으로 느끼며 신시아 프로스트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자,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리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전에 정성들여 빗겨 준 벌꿀빛 금발은 하얀 베일에 덮였고,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깊고 투명한 하늘빛 눈동자는 그 하얀 피부와 의상 덕분에 더욱 돋보였다. 엷은 장밋빛의 도톰한 입술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잎처럼 촉촉했다.
흰색의 간소한 옷을 입은 그 모습은 신부가 아니라 수녀처럼 보였다. 만나 본 적 없는 이에게 몸을 바친다는 점은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공주님, 저희들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업무를 마친 시녀들은 그렇게 말하고 차례로 방을 나섰다. 마지막 한 명이 문을 닫자 이 방에는 신뢰할 수 있는 시녀 로티와 신시아, 둘만 남았다. 보통은 그녀 이외의 사람과 만날 일이 없기 때문에 드물게 긴장했으리라. 신시아는 휴우 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신시아 님.”
살며시 귀에 들어온 온화한 목소리에 아래로 향하던 시선을 올렸다. 거울 너머로 보인 것은 로티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밤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부드러운 개암나무빛 눈동자를 그녀에게로 향한 채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고했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고마워.”
?나머지는 ‘그때’를 기다리는 것뿐.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듯 마음속으로 외쳤다. 거울 너머의 로티가 입술을 아주 살짝 떠는 모습이 보여 신시아는 웃었다. 아끼는 시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 직후 노크도 없이 기세 좋게 문이 열렸다.
“……윽.”
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방에 발을 디딘 인물을 본 신시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선명한 청은(靑銀)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그 틈으로 라일락을 연상시키는 진보랏빛 눈동자가 엿보였다. 부리부리한 눈매의 정갈한 얼굴에서는 마치 고고한 늑대 같은 기품마저 느껴졌다. 그가 걷자 어깨에 걸친 망토가 번쩍였고, 흰 바탕에 금테를 두른 예복 의상이 엿보였다. 늠름한 분위기의 그에게 반하기에 앞서 그 시선에 꿰뚫렸다. 분명하게 거울 속의 신시아를 향한 그 시선에서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 고정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 강한 의지가 담긴 시선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다. 일종의 기시감을 느낀 신시아의 뇌리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결혼해 줄 수도 있어.”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으로 고했던 거만한 한 마디는 어린 신시아를 겁주기에 충분했다.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가? 위압적인 그의 분위기에 압도된 어린 신시아는 저도 모르게 어머니의 뒤에 숨었던 것을 기억한다.
“…….”
그때는 어머니가 있었기에 이 시선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다정하게 품어 주던 어머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신시아도 누군가의 뒤에 숨어 피할 나이는 벌써 지났다. 신시아는 조용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보고 섰다. 역시 거울 너머로 보는 것보다 직접 마주한 그의 시선은 의외로 무서웠다. 하지만 지지 않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그와 대치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아름다운 입술이 천천히 말했다.
“내 것이 되겠다고 말해, 시아.”
예전과 다름없는 강한 의지의 눈동자에서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느껴져 얼어붙는 듯했다. 하지만 신시아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있었다. 자신의 안에 있는 각오를 용기로 바꾼 신시아는 그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싫어.”
어머니의 등 뒤에 숨었던 그때와 같은 대답을 입 밖에 냈다.
“나는 너의 것 따위가 되지 않아.”
의연한 목소리가 실내에 메아리쳤다. 그 직후,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방에 울려 퍼지더니 지금까지 두 사람의 모습을 살피던 로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로티의 목소리에 작게 숨을 토해 낸 신시아는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방 밖으로 옮겼다. 열린 문 앞에서 서 있던 몇 명의 근위병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신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시중을 들어 주는 로티에게도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신시아는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어 나가 그 자리에 머무른 그의 옆을 지나갔다. ?하지만 스쳐 지나기가 무섭게 손목에 열기가 내달렸다.
“!?”
매달리는 듯한 손의 힘에 깜짝 놀라 돌아보자 그의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숨을 삼키는 신시아에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고요한 시선과는 반대로 손목을 잡은 힘은 강해졌다. 긴장으로 식은 신시아의 살갗이 그의 열기를 흡수하여 서서히 따스해져 갔다. 그 따스함의 의미를 구하듯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신시아는 손목을 잡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살며시 그 손을 풀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역할을 다할 거야.”
각오를 말로 토해 낸 신시아는 그에게 미소를 보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향해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