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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88960532755
· 쪽수 : 584쪽
책 소개
목차
기항자(寄港者)
등댓불
봉화서 온 여인
박 의사(朴醫師)
갈대처럼
이율배반
기다리는 여자들
슬픈 아버지
밤길에서
봄은 멀어도
밑바닥까지
섬(島)
마지막 주사위
귀거래(歸去來)
파시(波市)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서영래는 얼굴을 들어 수옥을 쳐다본다.
“세상에 흔해빠진 게 여잔데, 니 아니믄 사람이 없겠나? 그런데 나는 니가 꼭 마음에 든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물건 주세요. 어머니가 야, 야단…… 보, 보내주세요, 아저씨!”
서영래는 싱긋이 웃는다.
“아저씨라고? 니 신랑이 될라 카는데 아저씨라믄 되나.”
“어, 어머니가 무, 물건.”
“흥, 서울댁 말가? 흥.”
비웃는다. 서영래는 다시 허리를 꾸부려 땅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한참 만에 그는 몸을 일으켰다.
“너 영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그는 가냘픈 수옥을 어린애 다루듯 번쩍 안는다.
“엄마!”
“다 큰 처녀애가 엄마가 뭐꼬.”
서영래의 눈빛이 달라지고 거칠어진다. 그는 발버둥치는 수옥을 큰방으로 끌고 간다.
“아무리 소리 질러봐도 소용없다. 이 천지에 너하고 나하고 둘뿐이다.계집과 사내 둘뿐이란 말이다!”
“이런 소리 하면 아직 젊은 너로서는 명성에 대한 집착으로밖에 생각 안 하겠지. 다 그렇게들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해. 굽히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야. 사실 사람에게 있어서 목숨을 지키는 다음의 가장 강한 본능이 그게 아닐까?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는 불안 다음의 것이 그 불안일 거야. 그 불안이 대부분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을 거야. 사람에 따라서는 굽히지 않겠다는 그 본능이 생존 본능보다 더 강할 경우가 있지. 외로운 것은 좋다. 외로운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비천해서는 못쓴다. 그것은 어떤 일보다 뼈에 사무치는 잊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러나 오만할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가 그 자리에 올라가야 되는 거구, 가질 것을 가져야만 그게 통하는 거다. 가질 것을 가져야만 그게 통하는 거다. 가질 것을 못 가지고 자리도 아닌 곳에서 큰소리친다는 것은, 그것은 개 짖는 소리에 지나지 않어. 자신을 잃은 생명처럼 불쌍한 것은 없다. 꺼풀이 강하면 모든 것을 튀겨버리지만 꺼풀이 약하면 피 흘리고 멸망하는 거야. 이야기 속에서나 비극이 아름다운 거지 현실 속에서는 비극이란 조금도 아름답지 못해. 그건 추한 거야. 추하지.”
박 의사는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차근차근히 말한다.
“너는 나처럼 돼서는 안 된다. 내가 살아본 하나의 결론이다.”
“결국 입신출세의 이야기 아닙니까.”
처음으로 우울하게 응주가 입을 뗐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별수 없지. 내 뜻을 이해 못하는군.”
“제일인자가 된다고 해서 그런 불안이 없어질까요? 어떤 이론이든 반드시 옆구리가 터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오히려 그 공리주의의 비극 속에서 오늘을 살고 있다고…….”
‘바다는 다 같은 바다인데 내가 선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는 아우성이 있고 통영에는 흐느낌이 있다. 어느 게 더 슬픈가? 시골 처녀가 남몰래 우는 것과, 밤길을 누비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술 취한 창부. 통영의 등댓불은 별빛같이 깜박이는데 저 외국 화물선의 불빛은 괴물이 쏘는 눈빛같이 황황하다. 상아같이 미끈한 백인과 흉측스런 검둥이, 슬픈 검둥이, 슬픔은 진실인데 진실은 추악한 것이란 말인가.’
응주는 무대에 서서 대사를 뇌듯 중얼거린다.
‘백인은 휘파람을 불고, 우리는 개미떼처럼 산등성이를 기어 올라간다. 그중 몇 놈은 이곳을 떠나서 키 큰 친구를 발돋움하고 올려다보며 그들의 몸짓을 모방하며, 그리하여 이곳을 잊으려 한다. 산등성이를 줄지어 올라가는 개미떼에 침을 뱉으며.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응주는 바다 위에 침을 뱉고 돌아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