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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 1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 1

(도성과 성곽)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 기획편집위원회 (엮은이)
  |  
동북아역사재단
2009-11-30
  |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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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 1

책 정보

· 제목 :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 1 (도성과 성곽)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고대사 > 고구려
· ISBN : 9788961871518
· 쪽수 : 388쪽

책 소개

고구려 역사의 현장-중국의 만주, 그리고 남북한-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대표적 유적과 그곳에서 발견된 유물을 한데 모은 책으로, 중국의 현장 답사와 조사의 과정에서 얻은 우수한 사진자료를 총망라하였다. 일제시기와 북한측 사진자료를 대거 수록하여 고구려 유적의 현상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목차

1권

Ⅰ- 도성
고구려 도성의 변천 개관
1_환인지역
(1)오녀산성
(2)환인댐 수몰지구
(3)하고성자고성
2_집안지역
(1)국내성
(2)산성자산성
(3)기타유적
3_평양지역
(1)평양성
(2)대성산성
(3)안학궁
(4)청암동토성
(5)도성주변의 사찰과 고분
Ⅱ- 성곽
고구려 성곽 개관
1_압록강 중상류
2_혼하, 요하 중상류
3_태자하, 요하 하류
4_압록강 하류와 요동반도
5_길림, 연길지역
6_북한지역
7_남한지역

2권

Ⅰ- 적석총과 봉토석실분
고구려 고분 개관
1_대형적석총
2_고분군
3_봉토석실분
4_남한의 고구려 고분
Ⅱ- 벽화고분
고구려 고분벽화 개관
1_평양권
(1)평양남포일대
(2)안악일대
2_집안 환인권
Ⅲ - 유물
1_금석문
2_금동공예
3_불상
4_토기
5_기와와 벽돌
6_철기
7_청동기

저자소개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 기획편집위원회 (엮은이)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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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 기획편집위원회의 다른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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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지는 잘 다듬은 쐐기형 돌로 성벽을 축조했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네 성벽이 모두 잘 남아 있었고, 각루와 치, 성가퀴 등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 이래 여러 차례 개축하면서 성곽의 원형이 많이 바뀌었다. 또한 1960년대 이래 시가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는 성곽이 많이 파괴되었고, 특히 동벽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북벽 바깥에도 해자가 있었지만 모두 매립되고 그 위에는 현대식 건물이 세워졌다.
한편 2000년경까지만 하더라도 서벽 안팎에 민가가 밀집하여 성벽의 모습을 보기 어려웠으나 2002년 이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이제는 전체 모습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다. 도한 남벽의 경우도 성벽 안팎뿐 아니라 위에까지 민가가 밀집하여 성벽 자체를 볼 수 없었으나, 2006년 이래 민가를 철거하여 성벽을 복원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대략 세 종류로 나뉜다. 먼저 잘 다듬은 쐐기형 돌로 가지런하게 쌓은 부분인데, 고구려 시기 성벽으로 하단부에 많이 남아 있다. 북벽 하단부에 퇴물림 방식으로 축조한 고구려 시기 성벽이 잘 남아 있다. 다음으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성돌로 불규칙하게 쌓은 부분인데, 20세기 초에 개축한 성벽으로 중간이나 상단부에 많이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크기나 석질이 다른 성돌을 무질서하게 쌓은 부분인데, 만주국이나 중국 내전기에 수리한 성벽이다. (1권 도성과 성곽, 집안지역 : 국내성)


475년 한성 함락이라는 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아차산 일원의 475년을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었으며, 551년 백제가 한강유역을 탈환할 때까지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475년 이전에 백제 수도 한성의 바로 북쪽에 보루들을 축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아차산의 보루들은 475년 이후 어느 시점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몽촌토성과 아차산 일원의 보루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 중 시간에 따른 형식의 변화가 잘 감지되는 나팔입항아리 등 토기류의 분석을 통하여 볼 때 몽촌토성 출토 고구려 토기류는 5세기 후반,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토기는 6세기 전반 경으로 편년된다. 몽촌토성 서남지구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의 온돌건물지를 비롯한 지상건물지, 다량의 고구려 토기의 존재를 근거로 475년 이후 일정기간 몽촌토성에 고구려 군이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발굴 조사된 유적의 구조나 농기구와 간이대장간 등의 시설물의 존재, 출토유물의 수량으로 보아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고구려 군이 주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홍련봉 2보루에서 520년에 해당하는 ‘경자(庚子)’명 토기편이 출토됨으로써 새로운 절대연대가 확보되었으며, 아차산 보루에 대한 연대관은 더욱 명확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 성과에 따르면 몽촌토성 내 고구려 유적은 475년 직후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어 500년을 전후한 시점까지 사용되었으며,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보루는 500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551년까지 사용된 것이다. (1권 도성과 성곽, 남한지역 : 한강유역의 고구려 성)


쌍영총은 1910년 발견 당시 이미 도굴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널길은 무덤칸 입구 가까운 곳까지 무너져 내렸으며, 앞방 동벽에는 도굴구멍이 크게 뚫려 있었다. 널길 양 벽에 남아 있던 우차(牛車)들과 기마대(騎馬隊), 악대(樂隊)를 포함한 60여 명의 인물들 가운데 대부분은 부실한 조사과정과 뒤처리로 말미암아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였다. 널길 양 벽에 묘사되었던 문지기 역사도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사도로 보아 실물 크기로 묘사된 역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윗니로 아래 입술을 깨문 채 무덤의 침입자를 향해 칼을 뽑아 내리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앞방 남벽의 동측 및 서측 벽에는 황색 저고리, 검은 물방울무늬가 찍힌 붉은 바지 차림의 문지기가 두 사람 입구 쪽을 향해 마주 보듯이 서 있는 모습이 묘사ㅚ었다. 두 문지기는 머리에 책(?)을 썼으며, 끈을 턱 아래에서 묶어 모자를 고정하였다. 손을 가슴 아래에 모아 마주 쥔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역시 현재는 모사도로만 원 형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상태다.
앞방 동벽의 청룡, 서벽의 백호 가운데 청룡은 머리와 상체 일부만 모사도로 남게 되었으며, 백호 역시 현재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이다. 앞방과 널방 사이에 세워진 두 개의 8각 돌기둥도 벽화로 장식되었다. 기둥의 몸체에는 포효하며 하늘로 치솟는 용을 그렸는데, 기둥을 감고 꿈틀거리며 머리를 쳐든 모습이 매우 역동적이고 생생하다. 기둥머리와 주춧돌에는 연꽃을 묘사하였다.(2권 고분과 유물, 평양권 벽화고분 : 쌍영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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