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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은 물, 임금은 배

백성은 물, 임금은 배

이정옥 (엮은이)
  |  
글누림
2012-11-30
  |  
20,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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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은 물, 임금은 배

책 정보

· 제목 : 백성은 물, 임금은 배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후기(영조~순종)
· ISBN : 9788963272207
· 쪽수 : 410쪽

책 소개

조선 후기의 문신 병와 이형상, 이 인물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병와 이형상은 백성들의 편에 서서 당화에 휩쓸린 조선조 후기 관료사회의 모순들을 혁신하려고 노력한 학자임과 동시에, 청렴한 ‘정치인’이었다.

목차

1부 백성이 궁하면 어찌 인심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첫 번째 글
백성은 물, 임금은 배
백성은 물, 임금은 배
항간의 말과 노래를 채집하여 책을 엮다
이인좌의 난을 토평하려다 무고의 혐의를
제주도의 실정과 풍속을 그림으로 남기다
백성이 궁하면 어찌 인심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유랑 무리들도 하늘이 낸 이 나라 백성인데

두 번째 글
전정(田政)은 공평 균등하게 정해야 할 것입니다
국고는 줄더라도 백성의 생활은 충족하게 하는 정치를
이 세상에 일찍이 발견하지 못했던 중요한 유적이
풍습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해괴하여 통탄할 일
비로소 한라산을 명산으로 승격하여 제를 지내다
아래를 거느림에는 반드시 관용에 이를 것이다

세 번째 글
왜(倭)에게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대의에도 벗어나며
외교에 있어서도 국익이 먼저요
관방의 시설에 대해 마땅히 미리 잘 대비할 수 있도록 강구해야
국력이 견밀하면 수모를 당하는 일이 어찌 있겠습니까
저 교활한 왜(倭)가

네 번째 글
노비 해방의 선구자, 그리고 가족사랑
약 천여 구(口)의 노비가 재물이 아니다
집에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어도
흩어진 것은 기운이고 없어지지 않은 것은 정신이니
마땅히 닦을 것은 오직 검소함뿐이다
게으른 습관으로는 선비가 못된다
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난다

다섯 번째 글
예악(禮樂)의 처음과 끝
예(禮)는 하늘의 도리, 악(樂)은 인성의 여운
우리나라에도 아악(雅樂)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음이 이미 잇소리에 치우쳐
명곡 최석정의 담론 : 성음과 악학을 완성하다
심지어는 공당(公堂)에서 노래 부르며 술병을 두드리는 자까지 있으니
다른 나라의 언어를 우리 문자로 기록하지 못할 것 없으니

여섯 번째 글
병와의 여행기
한라산을 오르다
입암유산록(立巖遊山錄)

2부 새롭게 주목할 인물, 병와 이형상
첫 번째 글
조선시대 목민관 병와 이형상
호를 병와(甁窩)로 삼은 이유
박상기(薄相記)
단금명(檀琴銘)
오성찬(五聖贊), 공재 윤두서의 <오성도>
숙종 임금의 유서(諭書)
병와의 인장과 낙관(落款)
혼돈각명(混沌殼銘)

두 번째 글
조선 최대의 저술을 남긴 병와 이형상
병와 이형상의 저술
나는 부자에게는 더 부자가 되게 하지는 않겠다
포부가 크면 세속과는 부합되지 못하고

저자소개

이정옥 (엮은이)    정보 더보기
·위덕대학교 자율전공학부 교수 ·고전시가, 문화콘텐츠 관련 연구 ·저서: 『나를 위한 글쓰기』, 『내방가사 현장연구』, 『고비에 말을 걸다』, 『내방가사 향유자연구』, 『영남내방가사1-5』, 『영남내방가사와 여성이야기』, 『경주에 가면 행복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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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머리말]

필자는 영천인으로 한빈한 집안에 태어나 학문의 길을 걸으며 영남의 명문 학인의 집안인 병와 이형상의 가문에 가연을 맺었다. 병와의 11세 후손인 국립국어원장을 지낸 남편과의 인연이 어느새 30년이 훌쩍 넘었고, 두 아들도 눈 깜빡할 새에 다 컸다. 두 사람 모두 학문 연구와 사회 활동한다는 핑계로 가정교육에 소홀하지는 않은 것인지 노심초사했다. 특히 어미로서의 도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자책을 하곤 했다. 그런데도 두 아들은 큰 탈 없이 다 큰 것 같아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곧 성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나이의 아들들, 또한 공직에 뜻을 둔 아들들을 생각하니, 수신(修身)의 범절이 왜 중요한지를 그리고 몸가짐을 바로하기 위해 수신의 경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이가 든 이 시점에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런 고민에 빠진 즈음에 300여 년 전 이미 인간 수련의 길을 앞서서 훌륭히 갈고 닦으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참으로 헌신했던 병와 이형상 선생의 수많은 저서들이 바로 내 곁, 우리집 서가에 있음을 발견하였다. 세상사 어떤 것은 신선함의 가치를 가진 것도 있으나, 오랜 시간 숙성의 인연으로 맺어진 것도 있음을 알 즈음의 나이가 되자 발견하게 된 글들은 보석같이 반짝거렸다.
조선조를 관통하는 걸출한 대학자였던 병와 선생이 남긴 책속의 글귀가 차츰 가까이 큰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남의 눈에 자칫 가문의 자랑으로 여겨질까 두렵지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나와 같이 아이를 기르고 남편과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정교육을 위해서, 더 나아가 무엇보다도 국민을 위해 일하고자 공복(公僕)이 된, 또는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병와 선생의 글을 꼭 읽히고 싶었다.
사실 처음 이 책은, 내 아이들에게 선조의 위업을 알게 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게 하기 위한 소박한 바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글을 읽으면서 행간 속에서 300여년 전의 병와의 올곧은 목소리가 처음에는 낮은 목소리로 들리다가 점점 큰 울림으로, 때로는 꾸짖음으로, 때로는 따사한 목소리로 나를 바로 세움을 느꼈다.
요사이처럼 공교육이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을까. 가정교육 부재, 인성교육의 실종의 시대이다. 이전 시대에 나의 이웃을 위해 헌신했던 병와가 인성 교육과 가정교육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당쟁의 파랑 속에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탐구했는지 우리 모두 한 번쯤 찾아볼 만하다는 생각으로 출판하려는 용기를 얻었다.
현실적 이유를 또 하나 더 든다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자주 듣고 말하면서도 새삼스러운 이 명구. 요즈음 치국한답시고자 하는 사람들이 수신제가(修身齊家)하지 못한 불미스러움을 자주 목도함 때문이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거지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면 결코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없다. 여기 병와 선생께서는 먼저 가정과 이웃을 바르게 이끌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그리고 힘없는 양민들을 위한 정치를 묵묵히 실천했던 목민관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병와 이형상(효종 4(1653)년∼영조 9(1733)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 또는 순옹(順翁)이다. 효령대군의 10세손이며, 성균진사를 지낸 이주하(李柱夏)와 파평윤씨 사이에 난 둘째 아들이다.
숙종 3(1677)년 사마시를 거쳐 16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환로에 나서면서부터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권력에 굽히지 않고 당화에 휩쓸린 조선조 후기 관료사회의 모순들을 혁신하려고 노력했다. 호조좌랑 재임 때는 동지사가 가지고 가는 세폐포(歲幣布)가 병자호란 이후 바쳐온 보포(報布)보다 9척이나 긴 것을 알고, 이것이 이후 무궁한 폐단이 될 것을 우려하여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늘어난 척수를 끊어버리고 보내었다.
성주목사로 재직시에는 민풍 교화에 힘써 20조의 훈첩(訓帖)을 반포하고 유생 150명을 선출하여 관비로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인조 때 의사 이사룡(李士龍)을 위하여 충렬사를 지어 그의 사적을 길이 남겼다. 한편 독용산성(禿用山城)이 파괴된 채 방치됨을 보고 민정(民丁)을 차출하여 3일 만에 완성시켰다.
동래부사 때에는 이 지역이 일본과 접경된 관문으로서 국방상 요지임을 절감하고 수비에 더욱 힘쓰는 한편, 당시 일본의 구송사(九送使)가 많은 폐단을 일으킴을 통감하여 이를 폐지시키려 노력하였다.
경주부윤 때에는 운주산(雲住山)의 토적 수천 명을 해산시켰으며, 향교와 서원에 교유하여 학풍을 진작시키고 향약과 향음주례를 강화하여 향촌 질서를 세우고 충·효·열을 민간에 장려하여 유교적 도덕정치를 실시하였다.
1703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제주의 누속(陋俗)을 일체 개혁하여 유속(儒俗)으로 바꾸게 하였다. 즉, 석전제를 행하였던 삼읍의 성묘를 수리하고 이름 높은 선비로서 선생을 정하여 글을 가르치게 하였고,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의 삼성의 사당을 세워 제주민의 신화를 존중하였다. 제주 해녀들이 나체로 잠수 작업하는 것을 일체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비로소 제주 해녀들은 잠수복을 입기 시작하였다.
병와는 목민관으로서 경세치용을 실천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하였다. 한편으로는 학문을 진흥시키고 문화재와 고적을 수리, 보존하는 등 문화적 치적도 남달랐다. 백성들의 풍속을 시대정신에 맞게 교화시키고 생활개선을 주도하였다. 당시 백성들은 송덕비 4개를 세워 그의 맑은 덕을 칭송하였다. 그런 그가 청백리에 천거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점점 격해져 가는 당파에 휩쓸리자 환로의 꿈을 접고 고향이 아닌 경상도 영천(永川)의 호연정(浩然亭)에 낙남하여 학문과 후학양성에 정진하였다.
병와는 전 생애를 통해 총 142종 326책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 목민관으로서의 경험과 성리학적 사유가 새로운 실학의 불을 당기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얻을 만한 대저술들이다. 그의 생애 경험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대표적인 저술, ??둔서록(遯筮錄)??, ??악학편고(樂學便考)??, ??강도지(江都志)??,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등은 국가 보물(제 256호 1~10)로 지정되었다.
마치 한 편의 역사드라마와도 같은 엄청난 사유의 진폭을 지닌 병와 선생의 삶을 간추려 내기가 쉽지 않았다. 1부 ‘백성이 궁하면 어찌 인심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중‘백성은 물, 임금은 배’, ‘전정(田政)은 공평 균등하게 정해야 할 것입니다’ 등에서는 목민관으로서의 개혁적인 삶을 조명해 보았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민풍을 바로 잡고 가난한 백성의 편에 서서 전제 개혁이나 세금을 줄이기 위한 합리적 방략을 제시했던 상주문을 읽노라면 병와의 백성 사랑하는 절절한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동래부사 시절, 왜관에 머문 왜인들의 횡포와 그에 동조하는 관원들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배여 있는 ‘왜(倭)에게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대의에도 벗어나며’ 편에서는 중앙 환로에 있는 예조판서에게 신랄한 비판을 서슴치않은 청백리의 올곧은 모습이 통쾌한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병와는 조선조 신분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몸소 실천하며 개혁으로 이끌었다. ‘노비 해방의 선구자, 가족사랑’에서는 재산으로 치부되었던 가노들을 모두 속량한 과감한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의 가족과 자녀들에 대해 항상 엄격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묻어 있는 몇 편의 편지글을 소개한다. ‘예악(禮樂)의 처음과 끝’에서는 성리학의 실천적 구현은 예악의 겸비에 의해 민풍을 순화하는 동시에 악학 이론의 뼈대를 세운 선생의 예약이론을 만난다.
‘병와의 여행기’편에서는 제주 목사 시절, 바쁜 목민관으로서 숨가쁘게 오른 한라산 기행을 함께 하는 기쁨도 누려본다. 또한 평소 병와가 존경하였던 여헌 장현광 선생을 뜻을 좇아, 입암 28경을 주유하며 관찰하기도 하면서, 여항의 민풍을 만날 수도 있었다.
2부에는 조선조 최대의 저술을 남긴 병와 이형상의 저술을 간단하게 종합 정리하고 번암 채재공이 쓴 행장과 대산 이상정이 쓴 발문과 함께 몇 편의 산문을 추록하였다.
병와는 어린 시절부터 일족이었던 지봉 이수광 가문, 그리고 식산 이만부 선생과 끊임없는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다. 거기에서 발견한 그의 경학(經學)과 주역(周易)에 대한 방대하고 심오한 학문과 철학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 학자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는 생각도 가진다. 많은 연구가 이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아직 완전히 공개되지 않은 병와 선조의 서책에 배여 있는 위대한 사상과 그 학문적인 세계를 간추려 많은 사람들에게 교양서로서 소개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글누림출판사의 도움으로 이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역사는 이성적일 듯하지만, 때로는 철저하게 비정하기도 하다. 사회 조직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을 마구 휘두르는 비이성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역사는 우리 개인이 직면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적인 삶을 이성적으로 윤색한 한 편의 드라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은 가장 비이성적인 부분까지도 냉철하게 평가하고 해석하고 분석하여 대안을 제시할 책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이 시대는 인문학적 성찰을 더욱 요구한다. 비록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문의 전당, 대학에서조차도 홀대받고 있지만…….
한 개인이 지켜내야 할 정직하고 깨끗한 숭고한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또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고결해야 하는지를 알리기 위해 편찬한 이 책에는 300년 전 병와가 이루어낸 인문학적 성찰 또한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빈한 목민관이요, 위대한 학자였으며, 따뜻한 인간이었던 병와 선생께 미흡하기 짝이 없는 필자가 추호의 누라도 끼칠까 가장 두렵다.
끝으로 일일이 거명하지는 않았으나 많은 선행 연구자들의 성과에 대해 감사한다. 어려운 출판사 사정에도 원고를 보자마자 곧바로 출판을 추진해준 글누림출판사 최종숙 사장과 이태곤 편집장, 안혜진 대리와 임애정 편집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30여 년 가까이 날마다 학생들과 호흡하며 살다가, 작년부터 최근까지 20여 개월, 잠시 강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이렇게 병와 선생의 글을 가까이 뵙고 되새기며 더 많은 내면의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게다가 책으로까지 출간할 기회를 얻음은 기대 그 이상의 큰 행운이었다.

2012년 11월 초겨울 이정옥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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