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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냐 자유냐

노예냐 자유냐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지은이), 이신 (옮긴이)
  |  
늘봄
2015-01-30
  |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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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냐 자유냐

책 정보

· 제목 : 노예냐 자유냐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서양철학 > 서양철학 일반
· ISBN : 9788965550358
· 쪽수 : 372쪽

책 소개

국가와 종교, 자본, 예술, 섹스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을 해부한다. 「늘봄 종교철학 시리즈」의 세 번째 책으로 집단보다 우위에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열렬하게 변호하고 증명한다. 저자의 사상의 원숙기에 쓰여진 책으로 저자의 사상을 집대성하며 세계 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목차

서문: 나의 사상의 모순성에 관하여

1장 인격
2장 상전과 노예와 자유인
3장 존재와 자유: 존재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4장 신과 자유: 신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5장 자연과 자유: 우주적 매혹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6장 사회와 자유: 사회적 매혹과 사회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7장 문명과 자유: 문명과 문화적 가치의 매혹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8장 자아와 자유: 인간 자신에 대한 노예성과 개인주의의 매혹
9장 통치권의 매혹과 노예성: 국가의 두 얼굴
10장 전쟁의 매혹과 노예성: 전쟁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11장 민족주의의 매혹과 노예성: 국가와 국민
12장 귀족주의의 매혹과 노예성: 귀족주의의 두 얼굴
13장 부르주아 정신의 매혹과 노예성: 재산과 금전에의 노예성
14장 혁명의 유혹과 노예성: 혁명의 두 얼굴
15장 집단주으의 매혹과 노예성: 유토피아의 유혹과 사회주의적 두 얼굴
16장 에로스적인 매혹과 노예성: 성, 인격, 자유
17장 미적 매혹과 노예성 : 미, 예술, 자연
18장 인간의 정신적 해방: 공포와 죽음에 대한 승리
19장 역사의 매혹과 노예성: 세 종류의 인간, 역사의 종말에 대한 해석,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종말론

역자 해설
재출간에 붙여서

저자소개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74년에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전통적으로 군인을 배출해 왔기 때문에, 그도 유년 시절 사관학교에서 군인 교육을 받았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부터 인문학적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베르댜예프는 부모의 허락을 받아 사관학교 생활을 중단하고 키예프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대학생활을 하던 1890년대는 러시아의 역사적 진로를 놓고 인민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일대 사상적인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베르댜예프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반정부 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볼로그다에서 유형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곧 유물론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특히 그의 사상은 인격이 지닌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극단성과 파괴성을 우려하면서, 1917년에 발발하게 될 러시아 혁명의 성격을 예견하였다. ≪인텔리겐치아의 정신적 위기≫, ≪자유의 철학≫, ≪창조의 의미, 인간의 정당화 경험≫과 같은 책들은 바로 베르댜예프의 이런 사상의 초석을 놓은 저서들이었다. 베르댜예프는 학문적인 명성 덕분에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20년에는 모스크바대학에 교수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권은 사회주의 건설에 걸림돌이 될까 우려하여 일군의 지성인들과 함께 그를 국외로 추방하고 말았다. 그는 그 이후에 베를린과 파리에서 종교철학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활발한 강연 활동과 저술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는 추방 시기에 자유와 인격에 대한 해석을 역사철학적으로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역사의 의미≫, ≪새로운 중세≫, ≪러시아의 이념≫,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과 의미≫ 등과 같은 명저들이 출간되어 나오게 되었다. 여기 번역한 ≪현대 세계의 인간 운명≫은 1934년에 출간된 베르댜예프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현대의 성격을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베르댜예프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 공산주의, 히틀러 치하의 독일 파시즘 체제, 그리고 서구의 자유주의 체제를 독특한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그에 따르자면, 이 세 체제는 얼핏 보면 서로 간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비인간화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체제들은 폭력적인 방식으로나 자본의 힘을 가지고 하나같이 인격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댜예프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기독교에 근거를 둔 영적 능력의 계발을 통해서 찾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베르댜예프는 현상으로서의 기독교 조직에는 그다지 만족하지 않았다. 그것은 물질주의, 초월적인 이기주의 등에 물들어 있어서 진정한 기독교적 사명을 담당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가 편협성을 버리고 사랑과 자유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회복함으로써만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듯 우리는 여기 번역한 ≪현대 세계의 인간 운명≫을 통하여 현대 사회에 대한 베르댜예프의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시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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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옮긴이)    정보 더보기
『산다는 것 믿는다는 것』(교문사, 1980), 『李信의 슐리어리즘과 靈의 신학』(종로서적, 1992) 등의 책을 지었고, 『노예냐 자유냐』(N. Berdyaev, 인간사, 1979), 『인간의 운명』(N. Berdyaev, 현대사상사, 1984) 등을 번역하여 출간했다. 지은이 이신 박사는 1927년 7월 7일(음력) 전라남도 돌산에서 아버지 이봉선 씨와 어머니 유금옥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건너가 부산 ‘초량상업학교’(부산상고 전신)를 다녔다(1944년 졸업). 이신 박사는 이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당시 일본 사람들이 세운 부산 시립도서관의 미술 서적을 거의 다 읽었을 정도로 미술에 관심을 두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은행에 취직했고 해방을 맞던 해에 혼인을 했으며, 1946년에부터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좋은 직장으로 손꼽히던 은행원 자리를 그만두고 고생길이 훤한 신학을 공부하겠다니 부모님이 거세게 만류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예술을 탐구하며 얻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갈구로 그는 미술 도구를 모두 팔아서 서울행을 결행,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한다(1946년 봄). 1950년 5월, 6·25가 발발하기 직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도 전의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다 6·25가 터지자 고향 전라도로 돌아가 활동한다. 당시 전라도 일대엔 초대교회로의 환원을 통한 교회 일치를 주장하는 자생적 기독교운동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이 일어났다. 이신 박사는 1951년 광주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연합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서적이며 근본적인 교회임을 깨닫고 당시 이 운동의 중심인물인 김은석 목사 등과 교류하여 환원해 목사 안수를 받고 충남 부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여기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이만수(李萬修)에서 이신(李信)으로 고친 것도 이때였다. 성령의 당해설을 주장하는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들과 달리, 성령의 현재적 역사를 체험하고 강조하여 선교사들과 대립한 끝에 부여교회를 사임, 전남 영암 상월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하다 다시 상경해 힐(Hill) 선교사를 만나 신학교 일을 도왔다. 그 후 충북 괴산 수리교회로 옮겨 목회하면서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부산에서 방송 선교에 전념하다가 서울 돈암동 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였다. 이 교회를 사임한 후 마흔 살 늦깎이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림을 그려 학비를 조달하고, 고국에 있는 가족(아내와 네 자녀)의 생계까지 짊어지는 고학 끝에 1967년 5월 네브라스카(Nebraska) 크리스천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8월 드레이크(Drake) 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드레이크 대학교를 한 해 다니다 1968년 9월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전학하여 신학석사 학위(1969. 12)와 신학박사 학위(1971. 5)를 받고 귀국한다. 귀국한 직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강사(문화신학)로 일했으며 중앙신학교(윤리학), 그리스도신학대학(히브리어 및 신학), 대한기독교신학교(서울기독대학 전신, 조직신학) 등에서 가르쳤다. 미국 출신 박사가 귀했던 시절 그는 출셋길이 보장되었지만 주요 교단 소속이 아니었기에 교수직을 얻기가 어려웠다. 소속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내 사정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국내 어느 신학자도 따르기 어려울 만큼 영어와 일어는 물론 히브리어, 헬라어까지 능통한 지성이었지만, 그는 주요 대학에 진출하지 못한 채 산동네 목회를 계속 하였다. 그는 산동네에서 정신박약아 등을 모아 돌보면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부귀영화와 신앙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신념을 택하며 산 것이다. 또한 오직 ‘밥’만이 추구됐던 1960년대, 미국 유학도로서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밥이 아니라 물질화하고 경직화해 창조적 상상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기독교 신앙의 한국적 자주성을 역설하였다. 허기진 물질적 곤궁 속에서도 그는 결코 창조성을 잃지 않았다. 그랬기에 비록 주요 교단으로부터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도외시당했지만 그가 외친 광야의 소리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다시금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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