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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건축 > 건축이론/비평/역사
· ISBN : 9788970597171
· 쪽수 : 182쪽
책 소개
목차
젊은 건축가들
가짜 도시 포템킨
빈의 건축
오래된 새것과 건축예술
건축 재료
장식과 범죄
건축이란
나의 첫 집
미하엘 광장의 로스하우스
오토 바그너
산에 지을 때
성의 몰수
요제프 호프만
리뷰
책속에서
건축가의 위신이 곤두박질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국가 제도이며, 두 번째는 건축가 자신이다. 국가는 빈공과대학이 주관하는 자격시험을 도입했고 수험생은 이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건축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장난은 도가 지나쳐 정부 지도자들은 ‘건축가’의 자격을 법으로 규제했다. 건축 관련 학과의 졸업생을 보호하려는 이유였다.
그런데도 빈 도시 전체가 이 사실을 비웃지 않았는데, 이미 많은 시민이 시험 제도에 길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건축을 익힐 수 있다고 믿었고 자격증만 획득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현상은 음악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음악학교에서 치르는 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람만 작곡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제도와 관계없이 음악은 절대적인 예술 그 자체일 뿐이다. (…) 그런데 시험 제도보다 더더욱 건축가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가 있다. 그것은 건축가 자신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깎아내린다. 세상도 수긍하는 사실이다. 이 나라의 젊은 건축가들은 어렵게 자격증을 땄음에도 기껏 건축 설계도를 그리는 존재일 뿐이다. 여기에선 그들이 가졌다는 예술가의 능력조차도 별반 소용이 없다. 그들은 그저 카운터 점원이 받는 정도의 월급을 위해 건축 청부업자, 건축기사, 건축가의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고용주는 자신의 아틀리에를 상업적으로 유지해야 하니, 기꺼이 젊은 건축가를 노동자로 고용한다.
노동자가 된 ‘건축가’는 고용주 앞에서 자신이 가진 예술가의 신념을 기꺼이 포기한다. 애초에 예술가의 신념은 있지도 않았다. 고딕 양식으로 오늘 하루를 마치고 나면 내일부터 출근하는 다른 사무실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에 매달려 구원받길 기다린다. 그러고는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며 반문한다. 젊은 건축가들은 동료끼리 잘들 지내며 사람들이 자신들을 상업적으로 대하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게다가 이들은 퇴근 후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술김에 고용주의 촌스러운 안목을 흉보면서 서로 안위한다. 다음 날 정각 여덟 시, 이들은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업무에 임한다.
‘젊은 건축가들’ 중에서
대대로 인간은 자신들이 사는 시대의 건축과 하나였다. 누구나 새로 구입한 집을 마음에 들어 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 집은 오로지 두 사람만 마음에 들어 한다. 바로 건축주와 건축가이다.
집은 모두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예술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예술은 예술가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 집은 그렇지 않다. 예술은 수요가 없어도 세상에 나온다. 집은 필요하니까 만든다. 예술은 책임이 없지만 집은 책임이 있다. 예술은 인간이 느끼는 편안함을 벗겨내지만 집은 안락함을 제공해야 한다. 예술은 혁명적이지만, 집은 보수적이다. 예술은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고 미래로 인도한다. 집은 현재를 생각한다. 인간은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인간은 안정의 기반을 흔들어대며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것을 증오한다. 그래서 그들은 집을 사랑하고 예술을 증오한다.
그렇다고 해서 집이 예술과 관련이 없으며 건축이 예술 아래로 기어들어가야 하는가? 아무렴 그렇다!
건축에도 예술이라 부를 것이 있긴 하다. 바로 묘비와 기념비다. 그밖에 목적을 지닌 모든 것은 예술의 영토에 속할 수 없다.
‘예술은 목적을 지닌다’는 말은 대단한 오해이다. 이 오해가 극복되고 ‘응용예술’이라는 기만적인 상투어가 국민 어휘에서 사라진다면 우리는 비로소 우리 시대의 건축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예술가는 오직 자기에게 헌신하고, 건축가는 보편에 헌신한다. 이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는 예술과 수공업을 짬뽕해 우리 자신과 상대편 모두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이로써 인류는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까먹었다. 인류는 쓸데없이 화를 내며 예술가를 몰아붙여 ‘창작’을 거세해왔다.
‘건축이란’ 중에서
수공업자는 책 볼 시간이 없다. 건축가는 모든 것을 책에서 배운다. 엄청난 양의 서적이 건축가가 배워야 할 것들을 남김없이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교묘하고 노련한 출판업자들이 찍어내는 무수한 출판물이 우리의 도시 문화에 얼마나 독극물 같은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의 자기 성찰에 얼마나 방해가 되었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건축가가 형태에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아 그것을 머릿속에서 모사해내든, ‘예술적 창조’로 독창적인 도안을 내놓든 결국 모두 같은 것으로 귀착됐다. 그 효과는 항상 똑같았다. 항상 흉측했다. 그리고 이러한 흉측한 짓은 무한 성장했다. 건축가는 자신의 작품이 책에 실려서 영원해지길 바랐다. 신문과 잡지도 앞다투어 건축가의 허영심을 북돋아주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건축가는 건축에 종사하는 수공업자들을 밀어내버렸다. 건축가는 도안을 배우면서 그것만 배웠기 때
문에 할 수 있는 것도 그것밖에 없다. 수공업자는 도안 작업을 하지 못한다. 손이 무거운 나이 든 장인은 도안 작업이 서투르고 어색하다. 그러나 건축 학교는 능숙한 도안가를 길러낸다. 민첩하고 세련되게 도안을 그리게 되면 어느 건축 사무실에서든 월급을 두둑하게 받을 수 있다.
그런고로 건축은 건축가의 손에서 그래픽예술로 전락했다. 성공한 건축가란 최고의 건축물을 지을 능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종이 위에 재능을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건축은 이제 건축의 대척점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예술 분야를 일렬로 쭉 세워놓으면 그래픽에서 회화로 가는 과정을 발견하게 된다. 그 과정의 끝에 조형미술이 등장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건축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그래픽과 건축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 시작과 끝인 것이다.
‘건축이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