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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프랑스소설
· ISBN : 9788970637914
· 쪽수 : 364쪽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시선을 돌릴 수도 없었다. 나는 최면에 걸린 듯 칼을 그녀에게로 가져갔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칼이 그녀의 목에 닿았을 때쯤 나는 병적인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여자를 죽이지 않는다면 여자가 나를 죽일 것이다. 그녀는 유대인이니까. 하지만 그러한 위험이 묘한 쾌감으로 다가왔다. 내 집에 포로로 붙잡아둔 여자, 새장에 든 유대인. 사실 아슬아슬하지 않은가. 그와 동시에 임무에 실패한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밀려왔다. 여자는 그 칼이 더 이상 자신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음에 틀림없다.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고, 이내 시선을 돌렸다. 어리석게도 목줄기를 드러내며. 나는 판자를 닫고 방을 나왔다.
“검정은 색깔이 아니라고 나탄이 그랬어. 검정은 그냥 어떤 색도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색의 부재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야. 내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까 내가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내게는 존재해.” 나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사랑해.” 그녀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악무는 바람에 그녀의 치아에 입을 맞추고 말았다. 그녀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댔고, 나는 부모님이 들을까 봐 겁이 나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것이 내 행복했던 환상의 마지막 몇 초였다.
“다들 유대인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 넌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할 거야. 오래 기다릴수록 살 가능성은 높아져. 한 해만 더 참으면 안 돼?”
그녀의 풀죽은 얼굴에서 나는 모욕감을 느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그녀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잡히면 죽는다고! 내가 지켜주고 있는 거야! 그녀 때문에 내 가족이 목숨을 잃었어! 내가 지금까지 살게 해주었는데,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는데, 도대체 왜! 그녀 때문에 그토록 애를 썼는데 결국 다 잃어야 한단 말이야? 그녀를 위해 나는 조국을 배반했어. 그런데 먹여주는 손가락을 깨무는 것으로 보답하다니!
그녀뿐 아니라 나 역시 내 거짓말 속에 갇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