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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사진/그림 에세이
· ISBN : 9788970638348
· 쪽수 : 264쪽
책 소개
목차
prologue ◆ 비밀의 방에서의 대화 007
Part 1 피터가 말을 걸었다
네 개의 뿔 014
몽(夢) 022
가만히 눈을 감으면 035
Peter 혹은 외삼촌 050
숲은 길을 잃어버렸다 056
비 오는 날 074
늑대와 할머니 080
나의 작지만 큰 물건들 094
아주 화려한 드레스 102
하이얀 색의 경험 107
단어의 무리 110
펼쳐진 시간 114
세계명작동화집 116
Part 2 피터에게 말을 걸었다
That sounds interesting! 126
식물일기 130
사슴공원이 나에게 남겨준 것 136
노란 방 143
달과 별 156
놓여진 열매, 돌, 구두 170
공원, 산책 197
알 수 없는 여정 202
작업의 의미 204
꿈의 기록 205
비탈진 언덕에서 206
언제나 ‘무제’는 기다림 210
흰 고깔모자 216
epilogue ◆ 검은 연못 227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어쩌면 내가 그리는 그림은 온통 이러한 (가짜) 종이달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지고 싶어 손을 쭉 뻗어보고 떼도 써보지만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대상들, 감정들. 그 아쉬움들이 한 방울 한 방울 맺혀 동굴 속에서 종유석을 이루고, 나는 손전등을 가지고 그것들을 찾아 동굴 속을 헤맨다.
_「달과 별」에서
열매는 물방울 모양으로 놓여 있다. 사뿐히 놓여 둥그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한때는 벌레와 새들이 이 열매를 갈망했을 것이다. 과거의 미모를 그리워하는 중년의 여성처럼, 열매는 속으로 애꿎은 시간을 탓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예전에는 분명 고운 빛깔의 빛이 났겠지. 지금은 시간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나쁠 것도 없다. 오랜 시간 시선을 붙잡아둘 수 있을 테니까. 예전에는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이제 슬금슬금 나올 때도 되었다. 엉덩이 근처에 있는 상처는 이제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다. 어디서 차가운 무엇에 부딪혀 살을 깎이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것일까. 아무쪼록 이제는 그 아픔이 아득한 기억이 되었기를 바라본다.
태어난 나뭇가지를 기억할 수 있을까? 안락한 곳을 떠나야 할 운명을 짐작할 수 있었던 유년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한 입 베어 먹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농익은 과즙을 맛보고 배꼽을 ‘후’ 하고 뱉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저 이렇게 놓인 그대로 놔두고 오래도록 바라볼 생각이다. 점점 바래가는 색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짓겠지만 그것마저도 좋다. 나는 그런 쓴맛을 무척 좋아하니까. 하지만 누군가 너를 탐낸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너를 내주어야 하겠지. 그러면 너는 나에게 텅 빈 자리로 기억될 것이다.
_「놓여진 열매, 돌, 구두」에서
해가 늦게 뜨는 겨울 아침에 무릎까지 오는 긴 패딩 점퍼를 입고 공원에 가면 손님은 나뿐이다. 가끔 산책자들을 마주치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티 나지 않게 놀란다. 바삭하게 마른 나뭇가지들이 엉성한 뜨개질처럼 얽혀 있고, 흙은 만지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차갑게 굳어 있다. 그러다 입춘이 지나고 겨울의 저항력이 물러날 때가 될 즈음엔, 손톱보다 작은 들꽃들이 풀밭에 옹기종기 피어나 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얼음이 녹고 새순이 돋아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실제로 공원에서 목격한 봄의 얼굴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활자를 읽기도 전에 사진으로 내용을 알게 된 신문의 1면처럼, 공원에서 맞이한 봄의 모습은 그렇게 놀랍다. _ 「공원, 산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