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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0639529
· 쪽수 : 376쪽
책 소개
목차
괄호 열고 닫기 07
단층 40
유리로 지은 집 72
하루나기 98
허수아비 130
보리암 가는 길 186
푸른 농어 낚시 220
시간의 늪 247
어떤 위인전 330
이상의 날개 337
작가의 꼬리말. 다시 시작하면서 366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상상력이 만들어낸 해답은 사실 정답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히려 상상력은 정답을 무너뜨린다. 정답을 해체시키고 무화시키는 데서 상상력은 그 자신의 몫을 거둔다. 나는 그림을 훔쳤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간 유대인들은 두 줄로 나뉘어 섰다. 나는 잡지에 발표한 글에서 그림을 사진으로 바꿔치기했다. 두 줄로 나뉘어 선 유대인들은 소독실로 또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림의 임자가 나타났다.
며칠 전이다. 내 수필이 실렸던 잡지사의 후배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한테 전해달라는 편지가 와 있다는 것이었다.
“편지?”
“미국에서 보내왔어요. 발신인은 조명곤.”
나는 후배가 들려준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내용이 뭔데?”
“남의 편지인데 함부로 뜯어볼 수 있나요? 하여간 형한테 전해 달라고 겉봉에 적혀 있어요.”
기억이란 참 마술 같은 것이다. 평소에는 망각의 늪 속에 매몰된 채 그림자조차 내보이지 않다가도, 어떤 계기로 수면 위에 떠오르기 시작하면, 거기에 딸려 나오는 과거의 파편들은 마치 천년 세월을 흙 속에 묻혀 있다가 발굴된 옥구슬처럼 영롱하기까지 하다. 과거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보석처럼 다듬어내는 시간의 마술이 소중한 것이리라. 이 같은 마법의 손이 없다면 우리의 시간이란 얼마나 거칠고 지겨운 것일까. 또, 거기에 붙잡힌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삭막하고 고단한 것이랴.
책은 그가 놓고 간 것이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받은 책이 벌써 열 권도 넘었다. 짐작건대 그가 나한테 선물로 주는 책들은 그로서도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일 터였다. 예컨대 에드먼드 윌슨의 『Axel’s Castle(악셀의 성)』은 경성제대 도서관 관인이 찍혀 있을 만큼 오래된 책이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 그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모르나, 그 책을 다시금 나한테 넘겨준 데에는 그만큼 깊은 그의 속정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책을 집어 들었다. 제목은 ‘유리로 지은 집’. 지은이는 박지문. 장편소설이었다. 표지를 열자 속표지에 증정의 말이 적혀 있었는데, 놀랍게도 받는 사람은 나였고 주는 사람의 이름은 박경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