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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선물

창조의 선물

(키에르케고르의 선물에 대한 단상)

이창우 (지은이)
  |  
대장간
2013-12-28
  |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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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선물

책 정보

· 제목 : 창조의 선물 (키에르케고르의 선물에 대한 단상)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신앙생활 > 신앙생활일반
· ISBN : 9788970713144
· 쪽수 : 172쪽

책 소개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우리를 향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문제는 삶의 질문은 말로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삶의 물음에 행동으로 또는 창조하는 작품으로써 답할 뿐이다. 아무도 삶이 걸어오는 질문에 대하여 대신 대답하거나 도와줄 수 없다.

목차

Chapter 1·창조
1) 창조는 계속된다
2) 하나님의 사랑은 불행이다
3) 진리의 교사는 예수님이시다
4) 영원은 순간이 된다
5)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

Chapter 2·실족
1) 초대에 응답하라
2) 안식하라
3)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4) 역사는 그리스도를 증명할 수 없다
5) 예수 그리스도는 신앙과 실족의 대상이다
6) 불행의 시대가 되다
7) 실족을 교육하자!

Chapter 3·존재론적 진공
1) 불안은 타락이 된다
2) 타락은 존재의 결핍으로 나타난다
3) 결핍은 이웃의 것을 탐하게 한다
4) 가인은 아벨을 ‘보고’ 분노한다
5) 시기는 살인을 부른다
6) 문화의 기원은 살인이다 5
7) 예배하지 않는 자는 분노한다

Chapter 4·선물
1) 삶은 하나님이 주신 의무이다
2) 최고의 기쁨은 선물이다
3) 완전한 선물은 받을 수 없다
4) 완전한 선물은 회개와 감사로 받을 수 있다
5) 지식이 세상에 들어와 사람을 슬프게 한다
6) 창조의 선물

결론

저자소개

이창우 (지은이)    정보 더보기
충남대학교에서 회계학을,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신학과 종교철학을 전공했다. 특별히 이 마지막 시대에, 새로운 세대를 다시 한번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교회가 가야 할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날로 변질되어 가는 복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에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 책 역시도 역자의 이러한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물이다. 200년 전에 이미 복음과 교회가 장차 변질될 것임을 우려했던 키르케고르와 생각을 같이 하여, 그가 쓴 강화집이 지금 시대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 시대 독자들과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저서로 『창조의 선물』, 역서로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이방인의 염려』, 『고난의 기쁨』, 『기독교의 공격』, 『성찬의 위로』, 『새와 백합에게 배우라』 등이 있다. 현재 도서출판 카리스 아카데미 대표, 카리스 교회 담임 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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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서문]

인생은 수수께끼이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그뿐 아니라 수수께끼 같은 삶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적어도 이 글을 읽을 자격을 갖추게 된다. 아직 인생이 수수께끼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면 책을 덮고 조금 더 인생을 살아보는 편이 나을 것이니 그런 독자는 빨리 책을 덮고 발길을 돌리는 편이 낫다. 그리고 인생이 수수께끼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때까지 기다리라.
사랑하는 독자, 당신은 수수께끼 같은 인생을 풀기 원하는가? 아, 그렇다면 역시 책을 덮고 발길을 돌리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이 책은 수수께끼를 풀 마음이 없고 오히려 인생을 수수께끼로 만들어 놓으려 하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인생을 더욱 더 수수께끼라는 것을 가르치려 한다.
사람들은 탐정소설을 좋아한다. 혹은 할리우드의 영웅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 혹은 공상 과학 영화나 소설도 좋아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주인공은 수수께끼 같은 인생을 척척 풀어낸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실마리를 찾고 문제를 해결한다. 우리는 주인공의 그런 영민함에 놀라고 감탄한다. 혹은 주인공의 능력에 감탄한다. 주인공에게 삶의 수수께끼란 아무 것도 아니다. 그에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독자 당신도 그런 탐정소설과 영화의 열광자인가? 혹시 그런 소설을 보면서 주인공처럼 되기를 원했는가? 혹시 영웅 스토리를 담고 있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했는가?
그러나 사랑하는 독자, 당신은 수수께끼 같은 인생을 잘 풀었는가? 모든 것을 훤히 다 보고 있는가? 예언의 은사가 있는가? 마치 예언자처럼 다른 사람의 인생도 해결해 주고 있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물어 보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기도를 척척 다 들어주고 계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응답받는 기도의 비밀을 가르치려하는가?

그러나 인생은 수수께끼이다! 또한 인생은 수수께끼로 남아야 한다. 수수께끼 같은 인생을 풀려하지 말고 즐길 수는 없을까? 만약 수수께끼 같은 인생을 풀려하는 것이 아니라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수께끼 같은 인생의 매듭은 우리가 풀 것이 아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푸실 것이다. 그때까지 잠잠히 기다릴 수는 없을까?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선지자, 사도,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하려 하는 자들은 정말로 풀 수 있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러 오신 분인가? 진리를 경험하면 수수께끼가 풀리는가? 오히려 진리가 수수께끼 아닌가? 사랑하는 독자, 아마도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진리이시다(요14:6).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인생의 수수께끼는 풀렸는가? 오히려 믿지 않은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더 큰 혼란이 왔는지도 모른다.

1장은 수수께끼 같은 인간의 삶 속에 진리가 어떤 방식으로 왔는지를 다룬다. 인간은 진리란 무엇인지 질문할 수 없다. 인간은 진리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인간 안에 창조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떻게 왔는가? 사랑에 의해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 원인도 사랑이고 목적도 사랑이다. 하나님에게서 원인과 목적은 같다. 이 진리가 사랑이고 사랑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 사랑을 미워했다. 사랑이 버림을 당했다. 세상에서 사랑은 서로 하나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 슬픔이 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받기 못하기 때문에 슬픔이다!
2장은 실족을 다룬다. 세상에 진리가 왔지만 인간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실족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를 보고 실족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수수께끼 같은 인생에서 괴로워하는 자들을 부르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모두 오시오”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참된 안식이 있기 때문이다. 수수께끼가 다 풀렸기 때문에 안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여전히 수수께끼임에도 불구하고 경험할 수 있는 안식이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에는 실족 사상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기독교가 타락하게 된 것은 실족을 상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장은 인간의 타락에 대하여 다룬다. 인간은 진리의 크기 앞에 서면 일종의 현기증이 생긴다. 왜냐하면 인간이 되어야 할 크기는 하나님의 크기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크기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코람데오)는 의미이다. 인간의 자유는 이 가능성을 실현해야 한다. 인간은 이런 가능성을 사랑하기도 하면서 미워하기도 하는 상반된 감정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이런 감정을 불안이라고 부른다. 이 가능성에서 도피하게 되면 타락한다. 따라서 타락은 새 창조부터의 도피이며 탈선이다. 타락은 존재의 결핍으로 나타난다. 무엇인가 내적인 공허감이 있다. 그러나 그 기원을 알 수 없다. 삶의 결핍은 수수께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런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이웃의 것을 탐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금하고 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결국은 이웃의 것을 탐하는 문제였다.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다 분노했고 결국 살인을 하게 된다. 가인의 마음속에는 시기가 가득하였다. 시기는 살인을 부른다. 문화의 기원 역시 살인이다. 이런 인간의 상태가 실족이다. 실족을 넘어서지 않는 한, 인간은 분노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인간의 실족을 폭로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두 가지의 길이 열린다. 즉, 믿든가 실족한다.
4장은 선물에 대하여 다룬다. 인생은 수수께끼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의 삶을 탐정소설처럼 척척 풀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놓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삶을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놓으셨다(전3:11). 먼저, 우리는 삶을 하나님이 부과하신 의무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의무는 윤리, 도덕, 법과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부과한 것이 아니다. 수수께끼로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이 부과한 것이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로서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허락하신다. 이 최고의 기쁨은 인간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또한 완전한 선물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인간이 완전한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완전한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창조하기 위해 새사람을 낳는다. 바로 야고보가 말한 창조의 첫 열매이다(약1:18).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 우리는 말씀 앞에 회개를 통해서 변화를 경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서, 이런 회개와 감사 역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다시 돌려받는 꼴이다.
그러나 의심은 계속해서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유혹한다. 즉, 의심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의심은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지 않는 한, “삶의 선물”을 받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는 충고한다.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아서 어떤 것도 받을 수 없다(약1:6-7)! 기독교는 오직 의심을 다음과 같이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즉, 잘못된 의심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러나 구원하는 의심은 믿음의 도움으로 오직 자신만을 의심한다. 자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다룰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이제 사랑하는 독자, 당신에게 향하기 원한다.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기 원하는가? 먼저, 인생이 수수께끼는 풀 수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을 감사함으로 받아라! 하나님은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라! 그때, 주님께서는 새 창조를 위해 당신이 처한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함께 하실 것이다!
끝으로, 이 글은 키에르케고어의 작품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독자에게 제공한 것임을 밝힌다. 그동안 키에르케고어에 대한 오해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가장 큰 오해는 우울, 불안, 절망 등을 다루어온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요 저작들과는 달리, 자신의 이름으로 낸 강화(설교)들은 선물, 창조, 사랑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키에르케고어에 있어서 삶은 의무이면서 선물이다. 나는 삶은 의무라는 측면을 강조했지만 먼저 존재의 선물이 주어지고 수용되어야 한다. 그에 의하면, 수용(acceptance)은 우리 인생에서 직면하고 있는 모든 과업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더 깊은 삶의 이해와 신앙적 성찰이 있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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