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2756767
· 쪽수 : 248쪽
책 소개
목차
1부
2부
3부
해설 | 너무 큰 어떤 나라와 너무 작은 어떤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_박혜경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
그 외에 어떤 표현도 부질없을 만큼 나는 정말이지 그저, 그랬다. 외모도, 성격도, 학벌도, 가정환경도, 그저 그렇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던하고 평범했다. 외동이었지만 무뚝뚝한 아버지와 걱정 많은 어머니 사이에서 때로는 장남이나 막내처럼 또 이따금 딸처럼 굴며 자랐다. 행이나 불행이랄 것 없이 큰 사고나 기복 없는 성장기를 보냈고, 흔하디흔한 맹장 수술로 병원에 입원해본 적도 없었다. 목숨을 걸 만한 첫사랑으로 열병을 앓아보지 못했고, 질풍노도의 사춘기랄 것도 겪지 못했다. 뚜렷한 고집에 의해 형성된 사고관도, 가치관도, 세계관도 없었으며 어디에 내놔도 별나고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하게 굴었다. 길 가다 흔히 마주치게 마련인, 어깨를 부딪치거나 소소히 말을 섞어도 돌아서면 쉽게 잊고 마는 보통내기였다.
……속내를 감추는 데 서툴렀고, 제 잇속을 챙기는 데 난처해했으며, 확신을 가진다, 는 것에 무엇보다 어려움을 겪었다. 세계는 테이블 위에 무질서하게 배열된 난수표처럼 매번 무엇을 집어 들어야 할지 곤란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선택 전엔 언제 어느 때고 오래 망설였고 선택 후엔 혼란스러워했다. 이것을 선택하면 저것을 선택해야 했다고 자책했고, 저것을 선택하면 이것이었는데, 라며 머리칼을 그러쥐며 후회했다. 인생은 선택과 집중이다, 라는 구절을 어느 책에선가 읽고 머릿속에 유념하며 살았지만 과연 그래, 인생은 선택과 집중이지, 라며 내게 유효한 패가 들어오는 때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그저 그런 사람, 이라는 말은 나를 설명하기에 꽤 적절한 듯싶은 것이다.
그러면요 형, 시란 도대체 뭘까요, 하고 나는 이따금 혼잣말처럼 물었다. 형은 시가 시지 뭐냐, 라고 싱겁게 대꾸하며 또다시 시는 전위적이어선 안 돼, 시는 이치를 좇아서도 안 돼, 시는 은유에 함몰되어서도 안 되며, 시는 구조 위에 지어지는 집이어서도 안 되며, 시는 종언을 위한 종언이나 혁명을 위한 혁명으로 기능해서도 안 되며, 시란 그저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동구 밖을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의 쓸쓸한 개, 라는 식의 도통 모르겠는 말들만을 알알이 부려놓았다.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는 말이, 그냥 좀, 멋있지 않아요, 아저씨? 난 멋있게 들려요. 바퀴는 구르는 게 당연한 건데, 뭐라고 말하지, 어떤, 힘 같은 거요, 그런 게 없으면 또 저 혼자 스르르 잘 굴러가는 건 또 아니잖아요. 내가 힘을 줘서 굴려야 하는 거고, 내가 굴리는 바퀴라면 당연히 내 것일 테고, 내 바퀴라면 또 당연히 내가 책임감을 가지고 잘 굴려야 하는 거고…… 아무 방향, 아무 길로나 굴리면 안 되니까 잘 생각해서 굴려야 하고, 아무튼 바퀴가 있다면 일단 굴리고 봐야죠. 안 그래요, 아저씨? 게다가 이 오토바이는 일 년 넘게 아르바이트한 돈을 모아서 처음으로 산, 내 전 재산이에요. 일단 이게 있어야 일거리라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끼니마다 먹여줘야 하는 기름 값이 내가 먹는 햄버거 값보다 비싸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긴 해도. 햄버거는 런치타임에 할인이라도 해주는데, 주유소는 그런 것도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