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스페인/중남미소설
· ISBN : 9788972758075
· 쪽수 : 328쪽
책 소개
목차
무중력의 사람들
작품 해설 시간(들)이 빚어낸 세계(엄지영)
부록 새로운 세계 만들기(발레리아 루이셀리)
옮긴이 주 301
리뷰
책속에서
모든 것은 다른 도시, 다른 생生, 그러니까 현생現生보다는 이전이고, 내생來生보다는 후인 생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여전히 내가 그 시공時空에 있고, 그때의 사람인 것처럼─이 글을 쓰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당시 지나쳤던 수많은 거리와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하게 말하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당시 상황을 표현할 적절한 시제를 찾기가 어렵다.
남편은 글을 굉장히 빨리 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면 달까닥달까닥하는 키보드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데, 조금만 써도 인물들이 목소리와 육체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소설의 인물들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한 페이지가 끝나면, 그는 인물들의 대사를 따라 읽는 버릇이 있다. 그건 극화劇化하는 과정이다. 반면 나는 나의 유령들을 흉내 내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말하는 식으로 글을 쓰는 것, 소리를 일절 내지 않고 환영과도 같은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언젠가 솔 벨로의 책에서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단지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살아 있는 이들은 중심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반면, 죽은 이들은 주변에서 어떤 종류든 중심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온몸이 꽁꽁 얼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면 그날 밤 저체온증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날 나는 처음으로 힐베르토 오웬의 유령과 함께 밤을 보내야 했다. 실제로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없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점점 내 삶이 아닌, 가능한 또 다른 삶이 내 안에 들어온 것처럼 존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존재의 삶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나는 급기야 바깥에서 중심을, 어떤 곳에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