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선 특명전권대신 박영효의 일본 여행기, 사화기략
박영효 지음(탁양현 엮음) | 퍼플
11,100원 | 20180813 | 9788924056280
성공한 메이지유신 실패한 갑오개혁 그리고 박영효
‘大朝鮮 特命全權大臣兼修信使’은 朴泳孝가 일본 訪問時에 사용한 공식 公職名이다. 使和記略은 박영효가 1882년(고종 19) 8월~11월까지 일본을 여행한 기록이다. 여행의 성격은 응당 外交 여행이다.
이 시기는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1868)’이 본격적으로 실행되는 시절이다. 때문에 이 시대를 연상케 하는, 최익현, 유대치, 김옥균, 홍영식, 서정범, 서재필, 요시다 쇼인, 사이고 다카모리, 사카모토 료마, 이토 히로부미 등 여러 이름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 裏面에는 이런 이름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Thomas Blake Glover(1838~1911)’를 말할 수 있다.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는 19세기 후반에 일본 ‘나가사키’ 市에 체류한 스코틀랜드 상인이다.
그는 사실상의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서, ‘나가사키’ 시내에 있는 ‘Glover Garden’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당시 일본내에서 가장 번성하던 ‘사쓰마 번(가고시마현)’에 신식 무기들을 판매하였으며, 그 무기는 1864년의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우리는 메이지유신이 세계 列强의 거대한 ‘Great Game’의 결과물 중 하나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나마 일본은 이러한 Big Picture를 이해하였기에 일련의 近代化를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예컨대, 勉菴 崔益鉉은 결단코 상투를 자를 수 없음을 端初로 衛正斥邪 義兵運動을 벌이다가, 對馬島로 유배되어 斷食으로써 殉國한다. 그리고 박영효는 다양한 활동을 지속하다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민족반역자로 규정된다.
使和記略의 使行은, 같은 해 6월에 일어났던 壬午軍亂으로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제물포조약에 의해 성사된 修信의 의미와, 한편으로는 金玉均이 사행의 일원으로서, 임금의 은밀한 교지를 수행하는 임무를 띤 것이었다.
이 기록은 같은 해 8월부터 11월까지 4개월간의 기록으로 주요 사건이 있는 날만 썼다. 그리고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비교적 자세히 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본 정부와 주고받은 공문은 원문을 그대로 소개했는가 하면, 외국사신들과 만난 기사도 주요 내용은 물론 앉은 배치도까지 그려져 있다.
이 기록의 주요 내용을 보면, 첫째,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배 안에서 태극기를 처음으로 고안해 사용했는데, 그 제조 경위가 자세히 밝혀져 있다. 둘째, 일본과의 修好面에서 앞서 체결한 제물포조약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손해배상금 상환기한을 5년에서 10년으로 연기하도록 고친 사실을 기록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의 경상도 歲收諸稅 중에서 순금·은으로 교환해 일본의 은화폐든지 금화폐의 量目에 비추어 해마다 5만원을 지불하며, 그 방법은 두 차례로 나누어 조선 元山港에 있는 일본영사관으로 수송시키기로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 이들 일행 가운데는 2년 뒤 갑신정변을 주도한 開化黨의 김옥균·徐光範과 그 반대파인 守舊黨의 거두 閔泳翊도 수행하였다. 이로 보아 당시 일본의 여러 발전상이, 우리 나라의 정치 변혁에 여러 가지로 작용했으리라는 면을 추측하는 자료를 담고 있다.
한편, 2개의 續約을 訂定한 내용도 담고 있는데, 제1관은 원산·부산·인천 항구의 里程을 조선의 이정법에 의해 사방 각각 50리씩으로 하고, 2년 뒤 다시 각각 100리씩으로 한다. 제2관은 일본의 영사·공사와 그 수행원의 가족이 우리 나라 內地의 각 곳에 유람하는 것을 허가하는데, 유람하는 지방을 지정해서 예조로부터 증명서를 주고 지방관은 증명서를 조사해 호송해야 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유학생도 약간 명을 인솔해 가서 입학시키고 이전에 가 있던 유학생을 데리고 왔다. 유학은 주로 語學校와 士官學校가 주였는데, 尹致昊도 이 때 유학했고, 일본에 있는 동안 일왕의 생일을 맞아 여러 외국 특사들과도 빈번하게 접촉했다는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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