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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88932038797
· 쪽수 : 364쪽
책 소개
목차
하나
둘
셋
미주
옮긴이의 말
버지니아 울프 연보
책속에서
누이의 학비로 쓰였어야 하는 돈이 독일어 교습비 등의 푼돈을 제외하고는 전부 아서의 학비에 들어갔습니다. 여행, 사교, 방해받지 않는 시간, 혼자 쓸 수 있는 공간 등등 누이가 누렸어야 했던 혜택(알고 보면 학업의 필수 요소)에 쓰였어야 하는 돈도 전부 아서의 학비에 들어갔습니다. 아서의 학비는 아무리 열심히 채워 넣어도 금방 비어버리는 돈 통이기도 했지만 대단히 중대한 사실(눈앞의 풍경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워버릴 만큼 중대한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고 있는 풍경은 같아도 우리의 눈에 보이는 풍경은 다른 것입니다. 교회를 비롯한 여러 건물들과 뛰어놀 수 있는 푸른 잔디밭이 있는 저곳, 수도원처럼 보이기도 하는 저곳은 어떤 곳일까요? 귀하에게 저곳은 귀하의 출신 남학교(이튼 아니면 해로)이자 귀하의 출신 대학교(옥스퍼드 아니면 케임브리지)이자 무수한 기억과 무수한 전통이 샘솟는 곳입니다. 하지만 아서의 학비라는 그림자를 통해 저곳을 보게 되는 저희에게 저곳은 교실 공동 책상이자 등굣길의 승합 마차이자 배운 것이 많지는 않지만 병든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붉은 코의 아가씨이자 어느 정도 자랐을 때부터 옷을 사거나 선물을 하거나 여행하는 데 쓰라고 받는 연간 50파운드의 용돈입니다.
고학력 남성의 딸이 지금 전쟁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생활비를 벌게 됨으로써 가지게 된 공평무사한 영향력뿐입니다. 고학력 남성의 딸에게 생활비를 버는 법을 가르칠 통로가 없어진다면 그 영향력도 없어질 것입니다. 고학력 남성의 딸은 임용되는 법을 배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임용되지 못한다면 다시 아비나 오라비에게 의지하게 될 것이고, 다시 아비나 오라비에게 의지하게 된다면 다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전쟁에 찬성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도 그 점을 의심의 여지 없이 증언해주는 듯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대학 개축 기금을 담당하는 재무 관리자님에게 1기니를 보내고, 그분더러 알아서 써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파시스트와 나치를 상대로 싸우는 사람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무장한 남자들뿐이겠습까? 그 독을 다 들이마시면서 그 독충과 싸워야 하는 여성, 아무도 모르게 무기 하나 없이 자기가 일하는 사무실 안에서 싸워야 하는 여성이야말로 파시스트와 나치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싸우다 보면 기력이 쇠하고 정신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여성에게 우리가 외국 독재자를 무찌를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그런 여성이 이 나라에서 독재자를 무찌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이 나라의 신문들을 털면, 가장 점잖다는 신문을 털어도, 무슨 요일 신문을 털어도 그 독충의 알이 이렇게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데, 이런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다른 나라들을 상대로 자유니 정의니 하는 이상을 떠벌릴 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