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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정의 [三]

논어정의 [三]

(권5·권6)

유보남 (지은이), 함현찬 (역주)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2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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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정의 [三]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논어정의 [三] (권5·권6)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유교철학/주역 > 공자/논어
· ISBN : 9791166842290
· 쪽수 : 376쪽
· 출판일 : 2023-08-25

책 소개

『논어』가 담고 있는 광범위한 영역과 주제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시할 것이다. 또한 현대적인 문맥에서 접근 가능한 표준적인 번역 작업을 수행하는 동시에 표점과 주해를 더하여 한국 유학에 있어 『논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의 지평을 넓혀 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해 제

1. 『논어정의』 번역의 가치

2. 원저자 소개

3. 『논어정의』 소개

4. 『논어정의』 번역의 필요성

5. 선행연구

일러두기

범 례

논어정의 권5

이인 제4

논어정의 권6

공야장 제5

색 인

저자소개

유보남 (지은이)    정보 더보기
1791년 강소성 보응현에서 아버지 이순(履恂)과 어머니 교씨(喬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 속에 성장하였다. 종부 태공(台拱)의 학문이 깊고 정밀하였으므로 그에게 전수받기를 청하여 학행으로 향리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제생(諸生)이 되었을 때 의징(儀徵)의 유문기(劉文淇)와 명성을 나란히 하여 사람들이 “양주이유(揚州二劉)”라고 칭송하였다. 도광 20년(1840) 진사가 되어 직례성 문안현의 지현(知縣)을 제수받았다. 문안현은 지형이 웅덩이에 비해 낮았는데도 둑이나 제방이 닦이지 않아 장마가 내리거나 가을 홍수가 나면 번번이 백성들의 해가 되곤 하였다. 이에 유보남은 제방을 두루 걸어 다니면서 병폐와 고통을 묻고 옛 서적들을 검토하여 일군의 주둔병과 백성이 함께 정비하도록 독촉하였다. 16년 동안 관직에 있었는데, 항상 의관이 소박하여 마치 제생 때와 같았다. 송사를 처리함에 삼갔고, 문안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쌓인 현안 1,400여 건을 자세하게 살펴 결론을 내렸으며, 새벽닭이 처음 울 때면 당청에 앉아, 원고와 피고가 모두 법정에 나오고 증거가 구비되면 때에 맞춰 상세히 국문하였다. 큰 사건이건 작은 사건이건 할 것 없이 균등하게 자기의 뜻대로 안건을 판결했고, 패도한 자는 법의 판례에 비추어 죄를 다스렸다. 무릇 소송에 연루된 친척이나 오랜 친족은 내외척 간의 친목(睦?)으로 깨우쳐, 대체로 화해하고 풀도록 하였다. 송사와 옥사가 한가해지고 나면 아전들은 자리를 떠나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으니, 멀고 가까이에 있는 자들이 화합하여 순량(循良)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논어정의』는 그가 38세에 뜻을 두고 착수하여 평생을 바친 저작으로, 청대 『논어』 연구의 결정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4권까지 지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아들 공면에게 이를 이을 것을 맡긴 후 함풍 5년(1855)에 죽으니, 향년 65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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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현찬 (역주)    정보 더보기
1963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1987년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2000년 중국 송대 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 한림원에서 한문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과 및 대학원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아울러 성균관 한림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장재: 송대 기철학의 완성자』, 『주돈이: 성리학의 비조』, 『(교수용 지도서) 사자소학』, 『(교수용 지도서) 추구·계몽편』, 『(교수용 지도서) 격몽요결』 등이 있고, 함께 번역한 책으로는 『논어징』 전 3권, 『성리논변』, 『증보 동유학안』 전 6권, 『주자대전』 전 13권, 『주자대전차의집보』 전 4권, 『역주 예기집설대전 2』, 『왕부지 중용을 논하다』 등이 있다. 이 외에 연구논문으로는 「《논어징》에 나타난 오규 소라이의 성인관」, 「《논어징》에 나타난 오규 소라이의 도 인식」, 「성리학의 태동과 정체성에 대한 일고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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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살펴보니, 『예기』 「표기」의 이 글이 이 장의 의리를 가장 충분하게 발명해 준다. 『전한서』 「외척전(外戚傳)」에 “연왕(燕王)이 글을 올려 ‘자로(子路)가 누나의 상에 기년(期年)이 되도록 복을 벗지 않았다.’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후한서』 「오우전(吳祐傳)」에 “색부(嗇夫)인 손성(孫性)이사사로이 백성들의 돈을 징수해서 시장에서 옷을 사서 아버지에게 바쳤다.”라고 했고. 『남사(南史)』 「장유전(張裕傳)」에는 “장대(張岱)는 어머니의 나이가 여든이 되자 임기가 아직 만료되지 않았는데도 바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했다.”라고 했다. 세 「전」에서는 모두 “허물을 보면 인을 알 수 있다”라는 이 문장을 인용해서 찬미하는데, 오직 「오우전」에만 “사람을 알 수 있다[知人]”라고 되어 있으니, “인(人)”과 “인(仁)”은 통용되는 글자이다. -59-60쪽


살펴보니, 중손확은 바로 맹희자인데, 『세본』에서 실수로 남궁도와 남궁열을 같은 사람으로 보았고 정군(鄭君)도 마침내 그 잘못을 따라 한 것이다. “열(閱)”과 “열(說)”은 통용되는 글자이니, 『춘추좌씨전』의 이른바 “열을 맡겼다[屬說]”라는 것은 바로 남궁열(南宮閱)이다. 또 이름은 중손열(仲孫閱)이고, 또 다른 이름은 남궁열(南宮說)이며, 그의 시호는 경(敬), 그의 자는 숙(叔)이니, 남궁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정군이 『세본』을 잘못 의존하는 바람에, 육덕명의 『경전석문』과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이 모두 그 잘못을 따라 쓴 것이다. 그러나 『전한서(前漢書)』 「고금인표(古今人表)」에서는 남궁경숙(南宮敬叔)과 남용을 서로 다른 두 사람으로 나누어 나열했으니, 『세본』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145-146쪽


지금 살펴보니, “여(與)” 자를 “합(合)” 자의 뜻으로 본 것은 한나라시대 유학자들의 오해(誤解)이므로 이것을 가져다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안사고의 『전한서』 「외척전(外戚傳)」 「주」에 “『논어』에서 운운한 것은, 공자가 성과 명 및 천도를 말하지 않았다는 말인데, 학자들이 잘못 읽어 공자의 말이 자연스럽게 천도와 더불어 부합한다고 여겼으니, 문구(文句)에서만 잘못된 것일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는 결국 뜻과 취지를 크게 어그러뜨린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는 전씨가 인용한 여러 설들을 모두 안사고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기』 「공자세가」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천도와 성명[夫子之言天道與性命]”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의 “성명(性命)”은 글자를 이어서 표현한 것[連文]이다. 완원의 『성명고훈(性命古訓)』은 공안국의 판본을 진본으로 삼는다고 했는데 의리상 옳은 듯하다. -248-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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