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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문화/역사기행 > 한국 문화/역사기행
· ISBN : 9791186351284
· 쪽수 : 300쪽
· 출판일 : 2020-05-25
책 소개
목차
1.들어가면서
기록유산이 넘쳐나는 함안
제작에서 활용까지 기록의 달인 오횡묵
각본 없이 반전이 거듭되는 <함안총쇄록>
살아 움직이는 기록을 위하여
2.관아 건물과 공간의 재구성
군수 부임 행차
수령의 읍터 몸소 살펴보기
새 군수의 조영
3.함안 읍성의 130년 전 모습
무너지지 않은 지과정 남쪽 성벽
사라진 현교와 새로 생긴 서문
새뜻한 동문루, 남루한 남문루
올라가 즐겨 놀았던 남쪽 성곽
실무적으로 쓰인 동문
높다란 데 자리한 북장대
4.함안 읍성의 지금 모습은
그윽하고 포근한 마른해자
명문 각석도 눈에 띄고
산지는 성벽도 대체로 온전
대문 너머 담장으로 남은 남문~동문
연못 앞에 노거수 우뚝한 북쪽 성벽
가장 심각하게 망가진 구간은?
명문 각석 사라진 남문터 서쪽
해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산지 읍성부터 원형 회복을
5.성산산성
목간의 최대 보물창고
기적 같이 환생한 고려시대 연꽃
오횡묵의 기록과 유리건판 사진
일제도 관심 갖고 고적 지정
군수가 백성 골탕 먹인 자리
산성 가는 산길을 아무도 몰랐다니
옛날 군사요충을 이제는 새 랜드마크로
6.세시풍속 : 복날과 정월대보름
복날에 팥죽을 먹다
팥죽을 먹었던 까닭은
복날에는 곤드레만드레?
지금은 사라진 함안의 줄다리기
줄다리기 승패에 목숨을 걸다
달밤에 줄다리기를?
같은 풍물이라도 대접이 달라
7.세시풍속 : 섣달그믐과 봄
섣달그믐밤 뜬 눈으로 밤을 새다
관아에서 푸닥거리를 하다
섣달그믐밤에 귀신 묻는 놀이를
경남 오광대의 시원 매귀희
3월의 마지막 날 봄을 보내는 낭만적인 전춘
재인 놀음 보면서도 봄을 보내고
8.함안대군물
진을 치고 전투까지 연출하는 대군물
왕비 탄신 대군물은 흥청망청
천총의 몰골은 염라대왕도 웃을 정도
원님 덕에 나팔 불고
민폐가 염려되어 중지했던 대군물
우스우면서도 눈물겨운 장면들
함안대군물의 출현을 기다리며
9.자이선·연처초연, 되살려 내고픈 그때 그 명승지
갈라터진 돌등에 새겨진 전임 군수의 행적
황폐해진 경관을 새로 단장하다
높고 또 넓게 켜켜이 쌓인 바위
함께 어울리는 열린 광장
자이선의 숨은 흔적을 찾아서
심복이 새긴 일곱 글자도
아직 못 찾은 글자들
10. 입곡 숲안마을 연계 골짜기
옥사를 피하여 입곡마을로
대접이 좋았어도 마음은 불편하고
청희당에 머물다 옮겨간 모희재
바위에 새긴 연계 두 글자
세상 넘기 어려웠던 보릿고개
평범한 백성과 아름다운 인연도
오탁수로 질병을 다스리고
산천은 간 곳 없고 건물은 그대로
오탁수 자리도 확인되고
11.낙화놀이
성 위에 오르지 못한 첫 번째 사월초파일
자이선에서 맞은 세 번째 사월초파일
“붉기는 꽃 같고 밝기는 별 같다네”
장터와 읍성 말고도 불놀이를
새롭게 전승된 함안낙화놀이
지역 주민 스스로 이룩한 재연과 전승
12. 관노들의 파업
한 섬이 12말도 되고 8말도 되는 비결
10년 전 장부까지 조사하고
밥줄 끊어진 관노들의 파업
파업을 맞은 오횡묵의 대처는
파업에 숨은 배후가 있었으니
파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빗줄기 맞으며 엿새 동안 석고대죄
13. 군수의 파업
엄청나게 떼어먹은 조세
대책이 없는 조세를 받아들이려니
웃통 벗고 화살 맞기
마산창에서 걷은 한 해 조세
곤장 소리 가득한 납세 현장
질질 끄는 양반 vs 문을 닫는 군수
군수의 일관된 뚝심 vs 양반의 소소한 저항
생일날 깔끔한 마무리
함안 백성보다 착한 백성이 없다
14. 한 손에는 매 한 손 에는 꿀
형벌은 갈수록 고달프게
죄인에게도 꿀물을 내려주고
진휼에 스며든 부정을 뿌리 뽑고
개별 구휼은 장터가 안성맞춤
활쏘기 시합장도 나누는 자리로
능멸하고 깔보는 데는 단호하게
원님 코앞에서 벌어진 노름
15. 검암마을이 품은 자연과 인물
너른 들판에서 받은 상쾌한 첫인상
함안에서 처음 천렵을 누린 자리
동네가 크다 보니 인물도 나고
나라 위해 목숨 바친 그 선조
여간 가깝지 않았던 이용순
고려에 의리를 다한 조순도 검암에
충순당 정려각과 조순 장군비
충순당의 고조부를 기리는 동산정
16. 가뭄 속 단 비 같았던 무진정
부임하는 날 보았던 무진정
주세붕의 눈에 비친 최초 모습
오횡묵이 본 달라진 무진정
무진정에서 보낸 즐거운 한때
권학을 위한 잔치를 무진정에서
군수 떠나가는 전별연도 무진정
봇짐장수 대회도 무진정에서
무진정은 무진정 이수정은 이수정
17. 한강 정구 놀던 별천계곡
한강 정구와 지역 선비들의 합작품 <함주지>
한강이 놀았던 별천계곡
오횡묵이 놀았던 별천계곡
시집도 묶어내고 글자도 새기고
한강을 기리는 다른 각자들
‘경현대’까지 더해져서
18. 사랑 독차지한 원효암·의상대
오횡묵이 치성을 들였던 자리
오횡묵의 눈에 비친 원효암·의상대
일반 백성들에게도 각별했던
함안에 하나뿐이었던 절간
원효암 주지스님은 허풍을 떨고
인연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19. 기우제는 비 올 때 까지
어느 날 보니 문득 가뭄이
몰래 쓴 무덤부터 파내고
첫 기우제는 사직단에서
나머지 기우제는 영험이 있는 데서
자이선에서는 비공식 기우제를
마지막 기우제에 비는 제대로 내리고
빌지 않아도 내리는 비
그래도 고맙게 풍년이 들어
20. 기우제 지낸 자리 지금 모습은
기우제 효력은 신통찮았고
모두 어려울 때는 ‘고르게’가 최선
금품도 주면서 관폐 줄이기도
기우제 자리는 지금 어디일까
주물진은 풍탄 나루
기록 풍부한 벽사단(와룡정)
험하고 높은 여항산
21. 습지 정경 속 제방과 보
오횡묵이 그린 습지 경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마을 쪽에만 있었던 옛날 제방
함안천에 남아 있는 옛날 제방
함안읍성을 있게 만든 가칭 ‘금천방죽’
혹시 오횡묵이 고생했던 그 제방?
술과 북어와 담배를 풀며 보(湺) 공사도
22. 객사는 없어졌지만 향교는 남아
객사 전패에 부임 인사를 올리고
제사 지내는 제물을 살피던 자리
시나브로 없어진 파산관과 태평루
공자 알현은 부임 사흘째에
강학과 시험을 치르던 향교
한 달 두 차례 객사·향교 들러야 했던 오횡묵
여전한 은행나무 살아남은 대성전
23. 그때도 감·수박·연꽃이 명산이었을까
감은 그때도 함안 곳곳에
아래로 베풀고 위로 바치고
받을 때는 청렴을 생각하고
일제강점기에도 대단했던
함안 수박의 명성은?
함안에 연꽃이 없다고 했으나
네 가지 서양 채소도 기르고
24. 머물러 달라는 만인산
보내는 아쉬움 선정비
1만 명 이름을 수놓은 만인산
만인산 선물에 담긴 뜻은
선정비는 헤어지는 아쉬움을
오횡묵이 찾은 마지막 함안 명승
떠나는 원님인데도 군악 의장을
책속에서
함안읍성은 1510년 경상도에서 삼포왜란이 터졌을 때 처음 쌓았고 1555년 전라도에서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고쳐 쌓았다. 오횡묵이 함안군수를 지낸 때는 이로부터 330년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읍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889년 4월 21일 부임 행로에 읍성이 나온다.
“(무진정 방향에서 오면) 지과정 오른편서쪽이 읍성이다. 북문은 오래 전에 무너졌고 지과정 남쪽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동문은 절반쯤 가운데 우뚝 섰는데 파동루(巴東樓)라는 현판이 달렸다. 성 위에 남녀가 빽빽하게 서서 구경하는데 사람성(人城)이라 할 만하였다. 남문 밖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 곡성(曲城)으로 들어가니 파남루(巴南樓)현판이 걸렸다.”
합안읍성에서 산지는 상당한 정도로 원래 모습이 유지되고 있었다. 경관을 조금만 정비하고 관리하면 훌륭한 생태역사탐방자원으로 새로 태어날 것 같았다. 성벽과 해자 안팎을 무성하게 뒤덮은 수풀과 흙더미를 일단 걷어내는 것이다. 성산산성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석축도 느낌이 있었지만 마른해자가 특히 색달랐다. 아무 데서나 쉽게 볼 수 없는 유적이기 때문이겠지만 그 부드럽고 유연한 모습이 왠지 좋았다. 성벽과 마른해자의 나란한 동행과 조화로움도 은근히 감흥을 일으켰다.
최헌섭 원장은 “지금 성벽은 100년 넘는 세월을 지나면서 안정화되었기 때문에 수풀과 흙더미를 제거해도 무너지지 않는다”며 “이렇게만 정리해도 곧바로 130년 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거리가 1킬로미터 안팎으로 적당하고 가파른 비탈도 없어서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산길이다. 조금만 손질을 하면 느낌도 산뜻하고 역사유적도 누릴 수 있는 산책로 하나가 새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정월대보름에는 다른 세시풍속도 있었다. 으뜸은 예나 이제나 달맞이였다.
“달맞이영월지유(迎月之遊)는 없는 마을이 없다. 계수나무 그림자(계영桂影)가 동쪽에서 나오자 늙은 농부들이 서로 축하하며 모두 금년에는 반드시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1890. 1. 15)
“조금 뒤에 얼음처럼 맑고 차가운 달이 올라왔다. 계수나무 그림자가 원만하면서 짙은 황색이었다. 모두들 ‘근년에 정월대보름 달을 처음 보았으니 마땅히 제일 좋은 징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한 해 전 정원대보름은 날이 흐렸었다. 그래서 달맞이를 할 수 없었다.
액을 쫓고 복을 부른다는 명목으로 정월대보름 전후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풍물을 놀고 금품을 받는 일은 요즘에도 종종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 마을 단위 모임이 주체인데 이렇게 모은 금품은 대개 공동 경비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