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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문화/역사기행 > 한국 문화/역사기행
· ISBN : 9791188296859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24-07-25
책 소개
목차
들어가는 말
1부 옛 다리, 우리 이야기를 찾아서
- 끈끈한 공동체를 하나로 이어주던 추포 노두길
- 단종의 넋을 기리는 주천강 쌍 섶다리
- 물의 섬, 그곳을 지키는 무섬 외나무다리
-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진천 농다리
- 아름다운 향기로 세상을 취한 경복궁 취향교
- 동쪽 길목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은 살곶이다리
- 능원 신장석을 가져다 만든 청계천 광통교
- 한 도시의 영광과 쇠락을 지켜본 강경 미내·원목다리
- 누각을 품은 이채로운 아름다움 태안사 능파각
- 역사의 파도를 과감하게 넘어선 한강 배다리
2부 근현대 다리 속 숨은 역사를 찾아서
-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군산 뜬다리부두
- 역사의 버거운 무게를 떠안은 한강철교
- 한강 최초의 인도교 한강대교
- 친일파 투기꾼 때문에 생겨난 공주 금강철교
- 아픔과 탄식, 희망의 다리 부산 영도대교
- 분단의 상흔을 오롯이 품은 철원 승일교
- 노량해전 자리에 부끄럽게 놓인 남해대교
- 무너져내린 한강의 기적 성수대교
- 명량해전 바다에 도박처럼 세워진 진도대교
- 정한으로 빚어낸 미투리 안동 월영교
저자소개
책속에서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 가는 길은 가히 다리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아니, 신안 섬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다리 박물관이다. 목포에서 압해도 가는 압해대교는 3경간 닐슨로제 아치교다. 압해에서 암태도 가는 길에는 ‘1004대교’라 명명한 다리, 곧 연속보의 접속교에 3주탑 현수교와 2주탑 사장교가 높은 위용을 뽐내며 나란히 서 있다.
암태도 주변 곳곳에는 노두(路頭)를 만든 흔적들이 남아 있다. 썰물을 이용해 짧은 거리 갯벌을 건너는 장치로 설치한 것들이다. 나룻배의 쓰임새와는 전혀 다른 갯벌에 낸 길이다. 수심의 영향으로 배로 건너는 게 비효율적일 수 있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는 징검다리를 놓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중 암태도와 추포도를 잇는 노두가 으뜸이다.
_ 끈끈한 공동체를 하나로 이어주던 추포 노두길
쌍 섶다리에 대한 유래가 재미나다. 숙종 24년(1698년) 11월 6일자 실록은 “노산군을 단종으로 묘호는 장릉(莊陵)으로, 그의 비(妃)는 정순(定順)으로 묘호는 사릉(思陵)이라 정하여 시호(諡號)를 추상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산군을 왕으로 복권시킨 것이다.
해가 바뀌기 전, 단종과 정순왕후 위패를 종묘에 안치시키는 일을 마무리한다. 약 250년 만에 왕 지위를 되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699년, 수차례에 걸쳐 장릉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수리한다. 윤7월 23일에서야 가까스로 능 수리를 마쳤다고 실록은 기록한다. 그러고는 강원 관찰사에게 장릉에 참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 관찰사는 우마차에 갖은 제수용품을 싣고 원주를 떠나 장릉으로 향한다. 길은 험한 산길에 구불구불 물길이다. 장릉을 60여 리 남겨두고 주천강에서 섶다리를 만난다. 다리는 낡아 있고 홑 섶다리였다. 백성들은 냉담하기만 하다. 처지가 난감해지려는 순간 이내 단종에게 제향(祭享)하는 관찰사 행렬임을 알아본 백성들이 발 벗고 나선다. 홑 섶다리로는 수레가 지날 수 없다. 주천리와 신일리 백성들이 각각 하나씩 섶다리를 새로 만든다. 그렇게 쌍으로 된 섶다리가 놓인다.
_ 단종의 넋을 기리는 주천강 쌍 섶다리
고종이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아래 남쪽에 판 연못이 바로 향원지(香遠池)다.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1867년에서 1873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 자리는 조카를 쫓아내고 죽이기까지 한 세조가 1456년 연못을 파 섬 안에 ‘비취빛 이슬’을 뜻하는 취로정(翠露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던 곳이다. 고종은 향원지 동남쪽에 담장을 쌓고 동쪽 담장에는 인유문(麟遊門)과 봉집문(鳳集門)을, 남쪽 담장에는 정중문(正中門)을 달아 출입을 통제한다. 고종은 연못을 네모지게 파고 한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들고는 그 안에 2층짜리 멋들어진 목조 정자도 짓는다. 향원정(香遠亭)이다. 어떤 향기가 그리 멀리까지 나아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름만은 정말 그럴듯하다. 건청궁 정문에서 계단을 내려와 향원정으로 향하는 자리에 널다리를 놓는데, 길이 32미터, 너비 1.65미터 규모였다. 고종은 다리를 취향교醉香橋)라 이름 붙였다. 역시 어떤 향기에 그리도 취했는지 의문이다. 권력이라는 달콤한 향기였을까? 아니면 나라와 백성을 살피지 못한 우매한 향기였을까?
_ 아름다운 향기로 세상을 취한 경복궁 취향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