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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설교/성경연구
· ISBN : 9791195046836
· 쪽수 : 180쪽
· 출판일 : 2014-03-01
책 소개
목차
- 책머리에
- 원본 사진 대조
- 도마복음서 번역 및 해설
- 단어 색인
저자소개
책속에서
머리말
도마복음서의 발견
'도마복음서'는 114개의 로기온, 곧 '예수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47년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곱트 박물관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일군의 고대 문서 뭉치 속에 포함된 내용 중 하나이다. 한 두해 전에 나일 강 상류에 위치한 '케노보스키온' 지방의 한 절벽 동굴 속에 숨겨진 항아리 속에 있던 문서 뭉치가 지역 주민들 손에서 어떤 장사꾼의 손에 넘어갔고 그가 그 발굴물이 지닌 가치를 알기위해 전문가들에게 문의하는 과정에서 카이로의 곱트 박물관장인 토고미나 (Togo Mina 1906-1949)의 손에까지 들어 온 것은 거의 기적이었고, 토고미나는 직감적으로 이 문서가 지닌 중요성을 인식하고 압류해놓고 있다가, 1947년 때마침 창궐하던 콜레라로 인해 목적지로의 이동이 불가능해져 잠시 카이로에 발이 묶여 체재하고 있던 프랑스의 젊은 언어학자인 장도레스 (Jean Doresse 1917-2007)를 자신의 사무실에서 만나는 기회가 생기자 그에게 어떤 내용이 실린 문서인지를 한번 살펴보라며 서랍에서 문서 뭉치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 때의 상황을 장도레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947년 가을 무렵 곱트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그 곳의 총책임자는 학문과 문화재에 대한 식견이 뛰어난 토고미나였으며, 특히 이집트 기독교 유산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 날 아침, 그는 나를 보자마자 서랍 속에서 한 무더기의 고대 문서 뭉치를 꺼내어 내 눈 앞에 내밀었다. 부드러운 가죽 커버가 있는 문서 뭉치였고 내면은 매우 아름다운 필체의 곱트어가 가득 기록되었는 데 언듯보아도 3내지 4세기경의 문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게 혹시 이 문서의 내용을 판독할 수 있는 지를 물었고, 첫 페이지의 첫 문장부터 읽어 내려가자마자 나는 그것이 초대 기독교 시대의 영지주의 문서임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가, 이 문서는 각각 제목이 붙여진 여러가지 서책의 집합이었고, '보이지 않는 큰 영혼의 성스러운 책'이라는 제목이 보이는 가 하면, 조금 더 나아가자 '요한의 비밀의 책'이라는 제목도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토고미나의 손을 잡고 뜨거운 감동으로 감사를 표했고, 너무나도 중요한 문서를 손에 넣은 그를 크게 치하했다. 그리고 즉시 그와 함께 긴 세월 동안 거의 떡이 된 문서 덩어리를 조심스레 떼어내며 면밀히 조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것이 기존에 발견된 '부르스 코덱스'라든가 '아스퀴와누스 코덱스'를 능가하는 중요한 문서들임을 알게되었으며, 이미 50년 이상 정체되어 있는 '베를린 문서'의 해독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내용도 실려있음을 알았다."
"토고미나의 허락 아래, 나는 이 놀라운 문서의 발견 소식을 프랑스의 이집트학자 에티엔느
드리오통 (Etienne Drioton 1889-1961)과 영지주의 사상의 전문가인 앙리 샤를 푸에슈 (Henri-Charles Puech 1902-1986)에게 알렸고, 그들과 함께 공동 연구진을 구성하여 문서의 출판 작업에 착수했다. 그와 동시에, 카알 슈미트 (Carl Schmidt 1868-1938)를 이어 '베를린 문서'의 연구에 침몰하고 있던 독일 아카데미의 월터 틸 (Walter Curt Till 1894-1963) 교수에게도 알려 그가 마침내 오랜 난관을 돌파하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서의 가치가 확인된 그 이듬해인 1948년 초부터 이 위대한 발견에 대한 보고가 이집트와 프랑스의 언론과 학계에서 동시에 발표되었고, 이후 수년에 걸쳐 각종 학술지에 이 문서에 대한 초기 연구가 이들 일부 학자들에 의해 속속 발표되었으며, 토고미나를 이어 카이로의 곱트 박물관장이 된 파호르 라비브 (Pahor Labib 1905-1994)에 의해 문서 전체가 사진판으로 출판됨으로서 모든 사람이 이 새로운 문서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은 1956년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바로 이 해에 일어난 수에즈 운하 사건으로 인해 이집트와 프랑스의 관계가 악화되고 중동에서의 프랑스의 전통적인 영향력이 급격히 하락하자, 프랑스 학자들의 독점적 연구에 대한 반발이 크게 일어났고, 네덜란드 학자인 질퀴스펠 (Gilles Quispel 1916-2006)의 적극적인 개입과 최종적으로는 유네스코의 힘으로 이 문서 연구를 국제 학술계로 이전시킨 미국의 로빈슨 (James McConkey Robinson 1924- ) 교수에 의해 새로운 문서에 대한 연구는 비로소 국제적 연구과제로 확장되었다.
로빈슨 교수를 핵심으로 하는 미국 학계의 노력은 프랑스의 독점적 연구를 종식시킨 반면 새로운 영어권 독점체제를 탄생시켰고, 그들이 그 어떤 변명을 할 지라도 문서에 대한 최초 발견자이자 첫 연구자로서의 장도레스의 존재와 그가 행한 10여년간의 모든 연구 업적을 없는 것으로 무시하고 국제 학술계에서 소리없이 퇴출시킨 만행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당시까지 이름없던 젊은 학자이던 장도레스가 소리없이 제거되자 자동으로 이 위대한 문서에 대한 첫 접근자들의 명단이 바뀌게 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최초 발견자이자 연구자들이라 자부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