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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0005838
· 쪽수 : 332쪽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 밑바닥에는 아직 충분한 공간이 있다
설경산수
카인의 사랑
지상의 양식
콩
길은 집을 짓지 않는다
그리운 쪽빛
우국제(憂國祭)
수국(水菊)
지팡이 끝에 놓인 산
저자소개
책속에서
세찬 바람이 또 한차례 어둠 속의 눈밭을 훑고 지나간다. 제풀에 스르르 눈꺼풀이 감긴 죽천선생은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며 더듬어 베개를 찾는다. 꿈인 듯 생시인 듯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눈 덮인 광야를 성난 말떼가 달리고 있고 숲에 가린 계곡 쪽에선 화약고 터지는 폭발음이 온 산을 울린다. 그리고 만세소리, 태극기의 물결... 그러다가는 또 피멍 든 육신 위에 다시금 잔인한 고문의 채찍이 휘감아들기도 하고, 검은 두루마기 차림인 한 촌로의 가슴을 향해 정체불명의 군인이 대검을 무참히 꽂는 장면도 어릿 스쳐간다.
광기(狂氣)의 시대는 제발 끝나야 해!
죽천선생은 비몽사몽간에 신음처럼 내뱉는다. - '우국제' 중에서
숲은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참 평화롭고 고즈넉한 듯싶어도, 조금만 더 깊숙이 안으로 들어가 유심히 살펴볼라치면 거의 경악에 가까운 참상이 전개되고 있게 마련이다. 네발 달린 짐승들은 짐승들대로, 온갖 새와 뱀, 지네, 불개미, 벌과 나비, 곤충들은 또 그놈들대로 서로 싸우고 잡아먹거나 먹히는 사투가 치열하게, 정녕 치열하고 처참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한참 재미있으면서도 통렬한 동물의 세계이나, 그러나 하늘에도 물속에도 가야 할 길은 저마다 다 따로 나있는 법이었다. - '콩' 중에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밤이 깊어갈수록 바람은 더욱 세차고 빗방울도 장대처럼 굵어진다.
마침내 아름드리 나무가 쓰러지고, 계곡이 넘친다. 우르르 쾅, 어디엔가 불벼락이 떨어진다. 실로 엄청난 폭우와 태풍이다. 이런 기세대로라면 그만 길 가는 사람이나 집도 날아가고, 하늘땅이 서로 뒤바뀔 것 같기도 하다. 무슨 피치 못할 저주를 불어예는 듯 진정 무서운 자연의 몸부림이 밤새 쉬지 않고 요동친다.
이튿날 아침, 세상을 온통 마구잡이로 하루키며 뒤집어놓은 비바람이 지나가자, 그는 부리나케 장화를 신고 호두밭으로 내달린다. 짐작했던 대로 탐스런 녹색 호두알들이 거의 다 땅바닥에 어지러이 떨어져 있다. 함부로 널브러진 나뭇가지와 쓰러져 누운 풀들, 그 위로 흘러 넘치는 물바다 위에서 그는 망연자실 하늘을 원망한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그 섭리의 위력 앞에서, 그는 또 문득 청설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한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외로움, 원망 따위가 뒤죽박죽 한데 뒤엉킨 기분을 안고 집 현관을 들어섰을 때, 그의 눈에 낯익은 웬 신발 한 켤레가 보인다.
아우의 젖은 밤색 구두이다. - '카인의 사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