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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시인 초간본 총서 - 전20권

한국 대표 시인 초간본 총서 - 전20권

김광균, 김기림, 김소월, 김영랑, 박목월, 백석, 오장환, 유치환, 윤동주, 이육사, 임화, 정지용, 조지훈, 한용운, 박두진, 이용악, 김상용, 김억, 김창술, 박남수 (지은이)
  |  
열린책들
2004-01-05
  |  
13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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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시인 초간본 총서 - 전20권

책 정보

· 제목 : 한국 대표 시인 초간본 총서 - 전20권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2904818
· 쪽수 : 4000쪽

책 소개

한국 대표 시인의 시집 스무 권이 초간본 모습 그대로 편집되어 출간됐다. 한국 현대시의 형성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는 이 총서는, 현재 선집의 형태로만 유통되고 있는 시집들의 본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저자소개

김광균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4년 개성에서 태어나서 개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1939년 『와사등』을 시작으로 『기항지』, 『황혼가』, 『추풍귀우』, 『임진화』 등의 시집을 펴냈다. 자오선 동인으로도 활동했으며 1989년 지용문학상을 받았다. 1993년 부암동 자택에서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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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8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함경북도 학성군(후에 성진으로 편입됨) 학중면 임명동 275번지에서 부친 김병연과 모친 밀양 박씨 사이의 6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아명은 인손(寅孫), 호는 편석촌(片石村)이다. 등단 초기 간간이 G. W.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바도 있다. 어린 시절 고향의 임명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한동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적이 있다. 13세에 성진의 농학교(중등과정)에 진학하였으나 1년 수학 직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에 다니게 된다. 보성 3학년 재학 도중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고향에 내려와 요양을 하게 되는데,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 학교로 복학하지 않고 곧바로 일본 유학을 떠나 당시 도쿄 소재의 메이쿄(名敎)중학[현재는 도쿄 근처 지바(千葉) 현 우라야스(浦安) 시 소재의 도카이(東海)대학 부속 우라야스고교]에 편입, 졸업한다. 졸업 이후 1926년 봄,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문학예술과로 진학하고 1930년 봄에 동 대학을 수료한다. 대학 재학 기간 중 서구 모더니즘의 여러 사조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귀국과 더불어 ≪조선일보≫ 사회부,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 창작과 비평 발표 등의 문필 활동에도 힘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글은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직후인 1930년 4월 27일에서 5월 3일까지 발표한 <오후와 무명작가들?일기첩에서>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평론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엄밀히 말한다면 문학적 감상을 섞은 단상 형태의 수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평론은 같은 해인 1930년 7월 24일에서 30일까지 ≪조선일보≫ 지상에 편석촌이라는 필명(호)으로 총 6회에 걸쳐서 연재한 <시와 시인의 개념-근본적 의혹에 대하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그는 활발하게 서구 모더니즘에 영향을 입은 시작 활동과 비평 활동을 꾸준히 병행하면서 당대 문단의 중심을 향해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간다. 그런 와중에 1933년 이태준, 정지용 등과 함께 모더니즘 문인들의 친목 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하여 모더니즘문학의 보급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다. 1935년은 그의 문단 활동이 정점에 이른 시기다. 대표작이기도 한 장시 <기상도>를 잡지 ≪중앙≫과 ≪삼천리≫에 연재하는 한편, 그의 초기 모더니즘시론의 핵심을 담았다고 평가받는 <오전의 시론> 시리즈를 ≪조선일보≫ 지면에 장기간에 걸쳐 의욕적으로 연달아 발표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스스로 모험을 감행한다.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학문 연구를 위해 재도일하여 도호쿠(東北)제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도호쿠제대 재학 기간 동안 조선 내 그의 문단 활동은 잠시 주춤하는 듯한 인상을 보이기도 하나, 이 기간 그는 영문학의 새로운 학문적 원리와 이론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문학관을 심화하는 한편, 보다 폭넓은 사회 역사적·철학적 토대 위에 종래 자신이 추구했던 모더니즘문학 운동의 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1939년 동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함과 함께 조선 문단 전면에 재등장한다. 복귀 후 한동안 문단 활동에 주력하지만, 1940년대로 넘어서자 점차 조여드는 일제의 압박에 회의와 위기감을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가 한동안 절필 상태로 지내게 된다. 친일 문학인들과 단체의 끈질긴 동참 권유를 뿌리치고 긴 침묵의 기간을 보낸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다시 가족과 더불어 서울로 올라온 그는 그간의 침묵을 만회라도 하듯 문단과 학계 양쪽에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이 발발된 직후 서울 거리에서 북한 기관원들에게 연행당한다. 그 뒤 북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한 내에서 그의 행적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뚜렷하게 드러난 바가 없다. 시론집으로 ≪시론≫(1947)과 ≪시의 이해≫(1950)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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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 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 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 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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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랑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영랑永郞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고향에 머물렀다. 1925년에 개성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다. 9·28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길에서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이 실린 《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 《영랑시선》(1949),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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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6년 1월 6일,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부친 박준필(朴準弼)과 모친 박인재(朴仁哉)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고성이지만, 본적지는 경상북도 월성군 서면 모량리(毛良里) 571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본명은 영종(泳鍾)인데 동시를 지을 때는 이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계성중학교 재학 중에 동요시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1933년, 윤석중(尹石重)이 편집하던 ≪어린이≫란 잡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고 같은 해 ≪신가정(新家庭)≫이란 여성 잡지의 현상 공모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된 이후 많은 동시를 썼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어릴 적에 누구나 애송했던 이 동요도 목월의 동시인 <얼룩송아지>를 가사로 하고 있다. 목월은 1939년 9월호에 <길처럼>과 <그것은 연륜(年輪)이다>로 첫 번째 추천을, 같은 해 12월에 <산그늘>로 두 번째 추천을, 그리고 1940년 9월에 <가을 어스름>과 <연륜(年輪)>이란 시로 세 번째 추천을 받고 공식적으로 시단에 등단했다. 후세에 남겨진 박목월(朴木月)이란 이름은 목월이 ≪문장≫지에 응모할 때 본인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작명할 때 아이디어는 수주(樹洲) 변영로(卞榮魯)와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에게서 따왔다. 수주의 나무 수 자를 나무 목으로 바꾸고 소월의 달 월 자를 그대로 따와서 붙인 이름이다. 조국이 해방되자 당시 출판계에 발이 넓었던 조풍연(趙豊衍)은 ≪문장≫의 추천 시인 몇 사람을 묶어 합동 시집을 내면 좋겠다고 을유문화사에 제의해서 ‘자연(自然)’을 공통분모로 시작을 하고 있던 박목월, 박두진(朴斗鎭), 조지훈(趙芝薰) 등 3인의 합동 시집을 기획하게 되었다. ‘청록집(靑鹿集)’이란 시집명은 목월이 제안해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46년 6월 6일, 해방 후에 처음 나온 창작 시집으로 ≪청록집≫이 간행되었다. 1947년 목월은 10여 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뒤에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의 교사로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 서울의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교편을 잡으면서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산아방(山雅房)’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했다. 1950년 6월에는 ≪시문학≫ 창간호를 조지훈, 박두진, 이한직(李漢稷) 등과 함께 발행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그 창간호는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목월은 공군종군문인단의 일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휴전 후에 홍익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교 등에서 강의하다가 1959년 4월 한양대학교에 부임해 1978년 은퇴할 때까지 국문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문리과대학 학장을 지냈다. 1968년에 시인협회 회장에 선임된 이래 작고할 때까지 연임했다. 1955년에 시집 ≪산도화(山桃花)≫로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8년에는 시집 ≪청담(晴曇)≫으로 대한민국문예상 본상을, 1969년에는 ≪경상도(慶尙道)의 가랑잎≫으로 서울시문화상을, 그리고 1972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지 ≪아동≫(1946), ≪동화≫(1947), ≪여학생≫(1949), ≪시문학≫(1950) 등을 편집하고 간행했으며 1973년부터는 월간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했다. 교수로, 시인협회 회장으로, ≪심상≫의 발행인으로 1인 3역을 감당하던 목월은 과로가 쌓여 갔다. 당시 그는 이미 고혈압을 지병으로 앓고 있었다. 1973년 삼중당에서 ≪박목월 자선집(自選集)≫을 간행했다. 그리고 1976년에는 생애 마지막 시집이 된 ≪무순(無順)≫을 발간했다. 한양대 교수직에서 퇴임한 목월은 그의 나이 63세 되던 해인 1978년 1월, 서울 원효로의 효동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장로 장립을 받은 지 약 두 달 만인 3월 24일, 새벽 산책에서 돌아온 뒤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누워 지극히 평안한 모습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용인 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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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옮긴이)    정보 더보기
(白石, 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여성』지 편집 주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직원, 만주 안둥 세관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이 외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 편집위원,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발표한 일련의 동시로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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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8년 충청북도 보은 출생,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중퇴하였다.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함으로써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적인 시와 동시 등을 발표하며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다. 해방 이후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현실 참여적인 시들을 창작하였다. 1946년 임화, 김남천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월북하였고 1951년 신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성벽(城壁)』, 『헌사(獻辭)』, 『병(病)든 서울』, 『나 사는 곳』, 『붉은 깃발』, 『에세닌 시집(詩集)』과 「백석론(白石論)」, 「자아(自我)의 형벌(刑罰)」 등의 다수의 평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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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8년 음력 7월 14일 경상남도 충무에서 아버지 유준수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한문 교육은 이후 그의 시에서 빈번한 한자 사용의 바탕이 되었다. 이후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922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교에 입학했다. 1923년 형인 극작가 동랑(東朗) 유치진과 함께 도쿄 교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이 무렵 유치진이 주도한 토성회(土聲會)에 참여해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26년에 한의원을 하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귀국해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27년 20세의 나이로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이해에 통영 지역 문인회가 간행한 ≪참새≫ 제2권 1호에 <단가(短歌)> 9편을 발표했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 학원에 다녔다. 이해 10월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경성 중앙보육학교 출신 안동(安東) 권씨(權氏) 재순(在順)과 결혼했다. 이 무렵 그는 일본 아나키스트 시인 다카무라 고타로, 구사노 신페이 등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29년 귀국해 형 유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掃除夫)≫를 발간했다. 이해에 그의 장녀 유인전이 태어났다. 1930년 유치진의 이름으로 ≪소제부 제1시집≫이 발간되었고 여기에 유치환의 시 <오월(五月)의 마음> 외 25편이 수록되었다. 1931년 24세에 시 <정적(靜寂)>을 ≪문예월간≫ 제2호에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이해에 차녀 유춘희가 태어났다. 유치환은 1932년 평양으로 이주했다.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아 폐업하고 시작(詩作)에 전념하게 되었고, 3녀 유자연이 태어났다. 1934년 다시 부산으로 이주했다. 1935년에는 화신연쇄점에 1년간 근무했다. 1937년 통영으로 이주해서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시 동인지 ≪생리(生理)≫를 부산에서 발행했다. 1939년 12월, 32세의 나이로 첫 시집 ≪청마시초≫를 청색지사(靑色紙社)에서 간행했다. 이 첫 시집에는 <기빨> 외 53편이 수록되었다. 유치환은 1940년 3월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일제의 압박을 피해 식솔들을 거느리고 북만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농장 관리인으로 지내는 한편 정미소를 경영했다.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된 여러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 북만주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들이다. 1945년 광복 직전인 6월에 귀국해 부인은 통영 문화유치원을 운영하고 유치환은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했으며, 8월 15일 광복 이후인 10월에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46년에는 청년문학가협회 초대 부회장에 이어 회장이 되었다. 1947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1회 시인상을 수상했다. 이해 6월에 시집 ≪생명의 서≫를 행문사에서 간행했고 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을 지냈다. 그는 1948년 3월 통영여자중학교를 떠나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1948년 8월에 시집 ≪울릉도≫, 1949년 5월에 시집 ≪청령일기≫를 행문사에서 간행했다. 유치환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이주했고 문인구국대를 조직해 육군 제3사단에 종군했다. 1951년 9월에는 문예사에서 종군 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1953년 4월에는 ≪예루살렘의 닭≫을 간행했다. 그는 1953∼1954년에 경북대학교 문리대 강사를 지냈으며 1954년 4월, 47세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다. 10월에 시집 ≪청마시집≫(시집 ≪기도가≫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의 합본)이 문성당에서 간행되었다. 그는 1954∼1957년 대구매일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다. 1955년에는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경주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56년 3월에는 경상북도 제1회 문인상을 수상했으며 1957년 50세의 나이로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1957년 12월에 시집 ≪제구시집≫을 한국출판사에서 간행했다. 1958년 2월에는 아시아재단 자유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2월 ≪유치환 시선≫을 정음사에서 간행했다. 그리고 1959년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재피선되었으며 산문집 ≪동방의 느티≫를 신구문화사에서 간행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경주고등학교 교장을 사임했으며, 12월에는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를 신흥출판사에서 간행했다. 유치환은 1960년 12월에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동서문화사에서 간행했다. 1961년 3월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며 1962년 7월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12월에 대구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1963년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장이 되었으며, 산문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를 평화사에서 간행했고, 7월에는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64년, 57세에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이 되었고 그해 11월 시집 ≪미루나무와 남풍≫을 평화사에서 간행했으며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5년 4월에는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됐으며,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을 지냈고, 11월에 시선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를 평화사에서 간행했다. 1967년 2월 13일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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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7년 12월 30일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8~1930년(12세~14세)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1931년(15세) 3월 15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16세)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는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20세)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 11월호에 동시 「병아리」, 12월호에 「빗자루」를 윤동주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1938년(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 9일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1939년(23세)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을 발표했다. 1941년(25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3년(27세)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작품, 일기가 압수되었다. 1944년(28세)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45년(29세) 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 16일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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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이가호와 허길 사이에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그의 형제 중 다섯째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다가 월북 이후 1950년대 초 숙청당한 이원조다. 어릴 때 조부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919년에 신학문을 접한 보문의숙을 졸업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대학 상과에 입학해 7개월간 다녔다.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었다. 일본 경찰이 장진홍이란 인물은 물론 단서조차 잡지 못하자,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진범을 조작해 법정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육사를 비롯해 원기·원일·원조 등 4형제가 함께 검거되었다. 원기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미결수 상태로 1년 반을 넘겼다. 그때의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1930년 1월 3일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이활(李活)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1935년 정인보 댁에서 시인 신석초를 만나 친교를 나눴다. 같은 해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다산문집(茶山文集)≫ 간행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했다. 1940년 4월에 베이징으로 가서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동창후퉁(東廠胡同) 1호에서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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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다. 임화는 필명이다. 1908년 10월 13일, 서울 종로의 낙산 아래에 위치한 보통 가정에서 태어난다. 1926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는 한편, 카프(KAPF)에 가입해 이후 우리나라 프롤레타리아문학 활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1927년에는 ‘임화’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다이즘 성격의 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카프에 몸을 담기 시작한 이래 일관되게 계급주의문학을 추구해 나갔다. 이듬해인 1928년에는 박영희의 지도를 받으며 김기진, 송영, 김영팔, 최서해, 최승일, 박팔양, 이기영, 안석영 등 카프 맹원들과 친교를 맺고 프로문학 운동에 더욱 깊숙이 관여한다. 1929년에 박영희의 도움으로 동경으로 가서 김남천, 안막 등을 만나 훗날 카프를 장악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이른바 제3전선파로 불리는 일본 유학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카프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바로 이 시기, 도일을 전후해 단편 서사시 양식을 개척한다. 또한 이즈음에 김기진과 박영희의 이른바 내용·형식 논쟁이 일어나는데, 임화는 박영희의 편에 서서 김기진을 기회주의적 개량형 활동가라고 비판한다. 이 무렵 영화에도 관심을 보여 <유랑>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한편 <혼가>를 직접 제작하여 개봉하기도 한다. 1931년, 동경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안막, 김남천, 권환 등과 손잡고 카프의 구세대 인물들을 일선에서 후퇴시키고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1931년에 벌어진 일제의 카프 맹원들에 대한 제1차 검거 사건에서 박영희와 함께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이듬해에 김남천 등과 함께 카프의 제2차 방향 전환을 주도한 후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 자리에 오른다. 1934년에는 박영희의 전향 선언이 나오고 세칭 신건설사 사건(전주 사건)으로 불리는 카프 제2차 검거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에 카프 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 인물이었던 그는 폐병으로 투옥을 면한다. 그러나 조직 내외의 여건이 악화되자 임화는 1935년에 카프 해소파들과 함께 카프를 해산하기에 이른다. 1936년 이후 정세 악화로 문학을 통한 정치적 투쟁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자, 문학의 정치적·현실적인 문제보다는 그 본질 문제나 문학사 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1938년에 이르러 첫 시집 ≪현해탄(玄海灘)≫을 발간하는데, 이 시집은 계급주의 이념과 서정성이 절실하게 조화를 이룬 수준 높은 시 세계를 보여 주었다. 이듬해에는 ≪개설 신문학사≫를 집필하고 1940년에는 일제 치하에서 가장 방대하고 수준 높은 평론집인 ≪문학의 논리≫를 발간하는 한편, 1944년에는 ≪조선 영화 연감≫과 ≪조선 영화 발달사≫ 등 영화 관련 저서를 집필하기도 한다. 광복이 되자 임화는 이원조, 김남천, 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하고 그 중심인물이 된다. 1946년에는 위조지폐 사건인 이른바 ‘정판사 사건’이 터지면서 미군정의 남로당 탄압이 적극화되는데, 이 어려운 때에 임화는 남로당 외곽 단체인 ‘민전(民戰)’의 기획 차장을 맡아 남로당 문화 담당 최고 이론가로 활동한다. 그런 와중에도 1947년에는 제2시집 ≪찬가(讚歌)≫와 시선집 ≪회상시집(回想詩集)≫을 발간해 문학 활동을 꾸준히 전개한다. 미군정의 남로당원 탄압이 심해지자 끝내 월북해 황해도 해주로 이동한다. 1948년 이후 박헌영이 있는 평양으로 가서 그를 지지하는 문학 노선을 견지하면서 ‘조선문화예술총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을 따라 서울로 돌아와 잠시 머문 뒤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간다. 이때의 전선 체험은 1951년에 발간한 네 번째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에 생생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이듬해에 관제 비평가 엄호석 등에 의해 이 시집의 시편들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정치적 비판을 받는다.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부에서 미제의 고정간첩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지은 책으로 시집 <현해탄>, <찬가>, <회상 시집>, 평론집 <문학의 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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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연일(延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신으로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시단 활동은 김영랑과 박용철을 만나 시문학 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에 요람동인(搖籃同人)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의 유학 시절 『학조』, 『조선지광』, 『문예시대』 등과 교토의 도시샤대학 내 동인지 『가(街)』와 일본시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런 작품 활동이 박용철과 김영랑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들과 함께 시문학동인을 결성하게 되었다. 첫 시집이 간행되자 문단의 반향은 대단했고, 정지용을 모방하는 신인들이 많아 ‘지용의 에피고넨(아류자)’이 형성되어 그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 이런 시적 재능과 활발한 시작 활동을 기반으로 상허 이태준과 함께 『문장(文章)』 지의 시부문의 고선위원이 되어 많은 역량 있는 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유작으로는 『정지용시집』(1935), 『백록담(白鹿潭)』(1941) 등 두 권의 시집과 『문학독본(文學讀本)』(1948), 『산문(散文)』(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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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경북 영양 출신으로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趙憲泳)과 유노미(柳魯尾)의 3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한학과 절의를 배워 체득하였고, 혜화전문과 월정사에서 불경과 참선을 연찬하였다. 여기에 조선어학회의《큰사전》원고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 형성된 학문적 바탕은 현대교육만 받은 사람들로서는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넓고 깊었다.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를 연결해 준 큰 시인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한국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만해 한용운을 이어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지사의 전형을 보여주며 한국 근대정신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경기여고 교사, 동국대 강사,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주요저서로는《청록집》,《풀잎 단장》,《조지훈 시선》,《역사 앞에서》등의 시집과《지훈전집》(《시》,《시의 원리》,《문학론》,《수필의 미학》,《지조론》,《한국민족운동사》,《한국문화사서설》,《한국학 연구》,《채근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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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지은이)    정보 더보기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10년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고, 그것을 1913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1914년 4월에는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였다. 1919년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불교계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3.1운동 때문에 감옥에 갔다가 석방된 뒤에도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했다.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뜻으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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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시인. 호는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정지용에 의해 〈향현〉, 〈묘지송〉 등이 《문장》에 추천되며 등단했다. 박목월, 조지훈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민족적 울분과 해방에 대한 소망을 자연과 신앙에서 구하는 시풍에서 출발하여,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과 영적 성숙을 위한 언어적 수행을 하나로 통합하는 시적 편력을 일관되게 보여 주었다. 연세대, 단국대, 추계예술대 등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아세아자유문학상, 서울특별시문화상, 3·1 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상, 동북아 기독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청록집》, 《해》, 《오도》, 《포옹무한》, 《수석열전》, 〈박두진 전집〉(전10권), 〈박두진 산문 전집〉(전7권) 등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이 있다. 그의 고향 안성에서는 그의 시 정신을 기리고 오늘에 되살리는 뜻에서 해마다 10월에 ‘혜산 박두진 문학제’가 열리며, 공모를 통해 ‘혜산 박두진 문학상’을 시상한다.(올해 제13회) 2018년 가을에는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 296 안성맞춤랜드 내에 박두진문학관이 이전·개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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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악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4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1935년 3월 시 「패배자의 소원」을 <신인문학>에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37년 도쿄 산분샤[三文社]에서 첫 시집 <分水嶺(분수령)>을 펴내고 1938년 두 번째 시집 <낡은 집>을 같은 출판사에서 펴냈다. 1947년 아문각에서 <오랑캐꽃>, 1949년 동지사에서 <이용악집>을 간행했다. 1950년 월북한 후, 1955년 산문집 <보람찬 청춘>을 민주청년사에서, 1957년 <리용악 시선집>을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발간했다. 1963년에는 김상훈과 공역으로 <풍요선집>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에서 펴냈다. 1971년 폐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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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 (엮은이)    정보 더보기
1964년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해 서울에서 자랐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를 역임했고, 지금은 한양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해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산창작기금,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내일을 여는 작가≫, ≪문학인≫, ≪작가연구≫, ≪문학수첩≫ 등의 편집위원을 지냈고, 지금은 ≪시작≫, ≪서정시학≫, ≪문학의 오늘≫ 등의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현대시의 형상과 논리≫(1997),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1999), ≪침묵의 파문≫(2002), ≪한국 시의 과잉과 결핍≫(2005), ≪현대시 교육론≫(2006), ≪문학 이야기≫(2007), ≪근대시의 모더니티와 종교적 상상력≫(2008), ≪움직이는 기억의 풍경들≫(2008) 등을, 편저로는 ≪강은교의 시세계≫(2005), ≪박영준 작품집≫(2008), ≪나의 침실로(외)−이상화≫(2009), ≪박팔양 시선집≫(2009)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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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 (옮긴이)    정보 더보기
1896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고 호는 안서(岸曙)다. 필명으로 ‘안서(岸曙)’, ‘안서생(岸曙生)’, 안서의 머리글자를 딴 ‘A. S.’, 에스페란토 이름인 ‘Verda E. Kim’ 등이 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 수업을 받았으며 1907년 정주 오산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1913년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1914년 부친의 사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으며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부임했다.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학예부 기자, 문예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직후까지 경성 중앙방송국에 근무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등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했다. 해방 후, 출판사인 수선사(首善社)의 주간을 맡았고 1946년부터 한국 전쟁 때까지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서 납북되어 북한 국영출판사의 교정원으로 배치되었다. 1956년 납북 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평안북도 철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억은 1914년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잡지인 ≪학지광≫에 <이별>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작품으로 <야반>, <나의 적은 새야>, <내의 가슴>, <밤과 나> 등이 있다. 이후 개인적 감정을 중시하고 감각적인 시어와 개성적 리듬을 강조한 시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편, 1916년 9월 ≪학지광≫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베를렌의 시를 번역한 <내 가?에 내리는 비>를 발표한 이래, 꾸준히 서구의 시와 시론을 번역·발표했다. 특히, 1918년 9월 창간된 ≪태서문예신보≫에 주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해 소개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에 상징주의 시풍을 정착시켰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 ≪개벽≫, ≪동광≫, ≪영대≫, ≪조선문단≫, ≪학생계≫ 등에 참여했다. 1925년 이후, 민요시 운동의 중심에 서서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민요시 창작에 주력했으며 한시 번역에도 힘을 쏟았다. 김억은 한국 현대시 최초의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를 위시해 ≪봄의 노래≫(1925), ≪금모래≫(1925), ≪안서 시집≫(1929), ≪지새는 밤≫(1930), ≪안서 시초≫(1941), ≪먼동이 틀 제≫(1947), ≪민요 시집≫(1948) 등을 상재했다. 그리고 베를렌, 구르몽, 보들레르, 예이츠 등의 시가 수록된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필두로, 타고르의 시를 번역한 ≪기탄자리≫(1923), ≪원정≫(1924), ≪신월≫(1924), 아서 시먼스(Arthur Symons)의 시를 번역한 ≪잃어진 진주≫(1924), 한시를 번역한 ≪망양초≫(1934), ≪동심초≫(1943), ≪꽃다발≫(1944), ≪야광주≫(1944), ≪지나 명시선≫(1944)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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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수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8년 5월 3일 평안남도 평양시 진향리에서 태어났다. 평양의 숭실상업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의 중앙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에 그는 희곡 창작에 뜻을 두었으나 곧바로 시 창작으로 돌아서서 평생을 시인으로 살아갔다. 1939년 10월 ≪문장≫에 시 <심야>, <마을>이 정지용의 추천으로 게재된 후 1940년 1월까지 <마을>, <주막>, <초롱불>, <밤길>, <거리> 등을 연속적으로 발표하면서 등단의 과정을 거쳤다. 그는 등단 이전에도 <삶의 오료(梧了)>(≪조선중앙일보≫, 1932), <여수>(≪시건설≫, 1935), <제비>(≪조선문학≫, 1936), <행복>(≪맥≫, 1938) 등의 작품을 발표한 경력이 있다. 그의 실질적인 창작 활동은 정식 등단보다 몇 해 앞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40년에 박남수는 첫 시집 ≪초롱불≫을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일본 중앙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첫 시집에는 모더니즘적 기법에 기반을 두고 감각적 이미지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시가 많은 편이다. 1945년에는 조선식산은행 진남포지점에 입사해 평양지점장을 맡는 등 직장 생활에 충실하기도 했지만,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한 이후로는 직장 생활보다는 집필 활동에 많은 비중을 두고 살아가게 된다. 1952년에는 현수(玄秀)라는 이름으로 ≪적치 6년의 북한문단≫을 간행하고, 1954년에는 문예지 ≪문학예술≫을 주재하면서 문단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 나갔다. 또한 1957년에는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등과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 제5회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첫 시집 간행 후 18년이 지난 1958년에 이르러서 제2시집 ≪갈매기 소묘(素描)≫를 간행했는데, 이 시집의 시편들은 이전의 이미지즘의 경향을 유지하면서도 삶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드러내는 특성을 보여 준다. 이후 1964년에는 제3시집 ≪신(神)의 쓰레기≫를 간행하는 한편, 1965년부터 1973년까지는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불안정한 시간강사 신분으로 불규칙한 집필 활동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도 그는 1970년에는 제4시집 ≪새의 암장(暗葬)≫을 발간하고, 1975년에는 장편서사시 <단 한 번 세웠던 무지개-살수대첩>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창작 활동을 실천해 나갔다. 1975년에는 이미 이민을 가서 미국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찾아 고국을 떠나게 된다. 이 시기에 박남수 시인은 플로리다, 뉴욕, 뉴저지 등지에서 과일 장사를 하는 등 생활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했다고 전해진다. 자연히 시 창작과는 거리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 정착한 후 6년이 지난 1981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제5시집 ≪사슴의 관(冠)≫을 발간했다. 이후 다시 10여 년간의 침묵 생활을 거친 뒤 1992년이 되어서 제6시집 ≪서쪽, 그 실은 동쪽≫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이즈음에 박남수 시인은 아주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다. 그 결과 1993년에는 제7시집 ≪그리고 그 이후≫를 발간했으며, 이듬해에는 다시 제8시집 ≪소로(小路)≫를 발간하고 ‘공초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8시집을 간행하던 그 해에 박남수 시인은 숙환으로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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