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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문학 > 일본문학
· ISBN : 9788954602990
· 쪽수 : 504쪽
책 소개
책속에서
나는 웃음소리다.
마음씨 고운 눈먼 소녀의 장밋빛 입술에서 터져나오는 해맑은 웃음소리다. 나의 가련함에 물거품 호수의 모래사장에서 놀던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크고 작은 다양한 모양의 고막을 진동시키고, 그들의 마음속 응어리를 지워버린다. 그리하여 부드러운 시선이 소녀에게 쏟아지고, 뒤이어 소녀가 짊어지고 있는 불행에도 집중된다. 내핍생활을 하는 자도, 나잇값도 못 하고 시기와 질투에 불타는 자도, 친지를 잃은 지 오래지 않은 자도, 오랜 세월을 함게한 남편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노망든 자도, 너나할것없이 모두 싱글거린다.
나에게 원인을 제공한 것은 호숫가로 밀려오는 늘 보는 잔물결이다. 오늘 소녀는 처음으로 호수에 들어간 것이다. 물결이 두 발을 간질이자 소녀는 엄마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웃고, 물방울을 튀기며 같이 뛰어다니는 하얀 개를 향하여 웃는다. 나는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타고 저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나는 호숫가에 있는 별장에서 혼자 지리멸렬한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는 미친 여자를 침묵케 한다. 나를 포착한 미친 여자의 귀가 짐승의 귀처럼 피끗피끗 움직이더니 그 눈이 점점 맑아진다.
그리고 나는 먹을거리를 슬쩍한 고양이를 걷어차고 있는 거지의 때투성이 귀에도 가 닿는다. 동시에 그가 휘두른 발이 공중을 가른다. 이어 나는 언덕 위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소년의 훌쩍거림을 거두어간다. 나는 또 덕망이 높다고 평판이 자자한 노승의 가슴속으로 숨어들어가, 먼 옛날 여자에게 처음 마음을 주었을 때의 추억을 되살려놓는다. 또는 마호로 마을 전체를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 바꾸어 놓는다.
6월 11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