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4622325
· 쪽수 : 264쪽
책 소개
목차
늪을 건너는 법
해설 | 류보선(문학평론가)
원초적 어머니의 유혹과 (야생의) '그것'들의 귀환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왜 이런 말을 하는가, 당신은 궁금할 것이다. 난 당신을 특별히 미워하거나 더욱이 존경하지는 않는다. 다만 당신이 안쓰러울 뿐이다. 일테면 당신의 개인사는 누군가에 의해 처음부터 철저하게 왜곡되었다는 것인데,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당신을 왜곡한 장본인의 의도대로 당신이 성장하고 처세하는 현재가 안타까울 뿐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피와 이름과 과거와 성장과 의지와 사랑 들이 모두 조작된 것이라면, 당신의 인생 자체가 그 처음부터 가짜 신분의 벽돌 한 개로 시작된 것이라면, 당신의 삶은 무엇이겠는가. 헛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지는 않는가. (……)
내가 이 사실을 당신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게 되었던 것은 당신이 당신의 출생 비밀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였고, 나로 인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은 얼마간 당신의 현재 삶과, 그 삶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당신의 입장과 처지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서 전혀 다른 관점으로 자신과 세상을 되돌아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다. 당신은 타인의 입장을 잘 헤아리지 않는 성벽을 지니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으고 있다. 난 당신의 그러한 태도가 정녕 당신 본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당신을 안쓰럽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 전봉구(田奉九)를 형성하는 요소들이 하나같이 진실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진 모르지만, 당신은 누군가에 의해 주입되거나 주사(注射)된 바람들로 가득찬 고무풍선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이 글을 읽고도 당신이 나의 작은 소망, 즉 자신과는 전혀 다른 계급적 입장이 되어 자신과 세상을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계기를 애써 갖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것은 참으로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마흔다섯의 나이에 그따위 장난에 신경을 곤두세우다니.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맞다. 나답지 않은 나를 새삼 발견하는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나스럽지 않은 내가 나스러운 나의 잠을 쫓고 있다는. 이것도 노쇠현상의 하나이려나.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나다운 것이란, 정신병자의 장난으로 일축해버리고 몇 분 동안 식식거리다가 감쪽같이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따위 짓밖에 할 줄 모르는 놈을 한껏 비웃으며 은근히 나 자신의 대범함에 도취되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이 나다운 거였다. 나의 출생과 입적과 맏이의 죽음을 잠을 설치며 곰곰이 되새기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