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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 조종국 예술혼 50년!

남계 조종국 예술혼 50년!

조종국 (지은이)
  |  
오늘의문학사
2018-08-08
  |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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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 조종국 예술혼 50년!

책 정보

· 제목 : 남계 조종국 예술혼 50년!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56699325
· 쪽수 : 360쪽

책 소개

문학사랑 수필선 138권. ‘예술의 영지’에 희수를 맞을 때까지 봉사한 예술계 활동을 총정리하고 있다. ‘예총과 나의 인생’에서는 충남 예총 회장과 대전 예총 회장, 한국예총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경험한 내용들을 세세하게 밝히고 있다.

목차

책을 펴내면서_
나의 예술 혼(魂) 50년! 지역문예 진흥에 묻다 ••• 3

1부 ◆ 예술의 영지(靈地)
남계화랑과 중도서예학원 설립 ••• 30
시민문화 공간 남계화랑의 수난 ••• 34
내 인생과 예총 ••• 37
선거와 인생 충남예총회장 자리! ••• 40
예총과 나의 운명 ••• 43
충남예술 발간 ••• 45
충남예총의 시련 ••• 48
한국예총과 인연 22년 6개월! ••• 51
대전청소년교향악단 창단 ••• 55
충청남도미술대전 16년의 역사 세상에 빛을 보다 ••• 57
충청남도산업미술대전 대전시산업디자인전 창설 ••• 59
전국예총회장단회의와 예총대표자대회 ••• 61
문화의 달 예술인대회 ••• 63
역사적 간행물을 남기다 ••• 65
국내정상 예술단 초청공연 ••• 67
국문전서체의 개발 ••• 70
국전 초대작가 지정 ••• 72
백제 사진대전 창설 ••• 75
국전초대작가전 ••• 77
공모전 관련 활동 ••• 79
1989년~1992년 충청미술 청년작가전 ••• 81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운영위원장 ••• 85
글씨 한 폭 ••• 88
글씨와 인품 ••• 91
기업과 예술이 윈~윈 하는 길 ••• 94
한·중(대전·남경)서화교류전 ••• 98
남계 조종국 서예 2012년전 ••• 102
대전예술 발행 충청문화예술의 선봉에 서다 ••• 105
대통령상 전국합창제 창설 ••• 107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메세나로 한밭문화제 개최 ••• 109
지역문예 진흥기금 조성 ••• 112
문화예술계 문화공동체 의식 필요해! ••• 114
우리고장 문화유산 발굴과 보존 ••• 117
백제 사비궁(四沘宮) 홍의당(弘毅堂) 현판과 지석(誌石)글씨들! " " " 120
국보 제7호 봉선홍경사갈명 (奉先弘慶寺碣銘) 글씨 남기다 " " " 125
사글셋방에 살면서 " " " 127
서예인과 자기실현 " " " 130
서예인의 자질 " " "133
원로·중진·중견작가 한·중(대전·소주)당대서화명가전 " " " 136
대전직할시 미술대전 역대 수상작품전 " " " 140
가톨릭미술가회 창립 " " " 142
영원한 스승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선생님 " " " 144
예술 향수 층의 개발 " " " 147
2017년 사드문제 이후
중국과 문화교류 물꼬 튼 한·중(대전·우한)서화교류전 " " " 151
나라와 지역을 빛낸 선인들 기념비제작에 열정을 쏟다 " " " 154
’93 대전엑스포 한빛탑 건립기 " " " 158
한성기 시비 " " " 160
인공위성 우리별1호 발사기념비 " " " 162
일류와 삼류 " " "164
서예저작권법과 내 아들을! " " " 166
지방문화 재창조 " " " 171
세계역사문화명성도시엑스포 대전광역시 풍물단 공연 " " " 176
한국서예협회 창립 " " " 178
한·중 문화교류회 설립 " " " 181
WTA(세계과학도시) 중국 안휘성합비시
한·중(대전·합비)서화교류전 " " " 183
향토(鄕土)예술인을 사랑하자 " " " 186
활(國弓)을 쏘고 장구를 치고 " " " 189
흙의 신비 남계 조종국 도서전(陶書展)을 열면서! " " " 192
충남 개도 100주년 기념 충청서예가전 " " " 194
고난의 인생과 상복(賞福) 충남도문화상(예술부문) 수상 " " " 196
한국예총 예술문화상 대상 수상 " " " 199
서울신문사 향토문화대상 본상(本賞) " " " 202
시사 투데이 선정 2013년 신한국인 대상 " " " 204
자랑스러운 부여인상 " " " 206
대전광역시문화상 수상 지역사회 봉사부문 " " " 208
정겨운 고향 부여!
부여 개군(開郡) 100년을 빛낸 인물상 " " " 210
국제우인송장전례(國際友人頌ª'典禮) 강소성을 빛낸 인물상 " " " 213

2부 ◆ 예총과 나의 인생
부여엽연초생산조합 설립 " " " 218
붓글씨의 육기(六氣) " " " 221
내 마음의 꽃신 " " "224
식소사번(食小事煩) " " " 226
고마운 분, 김정호 서장 " " " 231
남편 대신 가장 노릇한 아내! " " " 234
예(銳)와 둔(鈍) " " " 237
예술과 情熱 " " "240
예술인과 고독 " " " 243
내 마음의 빨간 꽃신을 신고 고향적 공동체를 꿈꾼다 " " " 246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사회를 " " " 250
병속의 금방울을 꺼내려면 " " " 254
오류동(五柳洞) 연가(戀歌) 1 " " " 258
오류동(五柳洞) 연가(戀歌) 2 " " " 261
정석모 장관과의 특별한 인연 " " " 264
코드 그린 " " " 267
토끼와 거북이 " " "270

3부 ◆ 정치가 문화에 정을!
정치가 문화의 정을 " " " 274
1971년 국가비상사태와 서울신문기자 " " " 277
낙선의 고배 " " "280
제2대 대전시의원선거 전국 최다 득표 당선 " " " 283
제2대 대전시의회 의장선거 1표차 낙선 " " " 286
제3대 대전시의회 의장선거 만장일치 당선 " " " 288
강창희 의원 떠난 자리 " " " 291
노무현 대통령후보 지지 선언문 " " " 295
‘죽어야만 산다’ 자민련 조종국 위원장 제언 파문 " " " 300
지역공동체운동 선봉 한화이글스후원회 창설 " " " 303
사드문제 이후 한·중 우호관계의 중요성 " " " 306
이상적(理想的)인 지도자 " " " 309
스크린쿼터 사수 " " " 312
예술인 복지법과 협동조합 " " " 316
텃세 考 " " "319
중국·일본과 의정활동 넓히다!
남경(南京)시 인민대회와 의정교류 " " " 322
일본오오다(大田)시 의회와 의정교류 " " " 324
국제 문화교류지원 사업 이대로는 안 된다 " " " 326

4부 ◆ 타인의 시선
우한(wǔh " " " 330
남계의 書法과 삶의 세계_ 김복영 " " " 340
南溪의 藝術과 人間性_ 홍성유 " " " 343

상장·상패·위촉패 " " " 343

저자소개

조종국 (지은이)    정보 더보기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2011년 제30회) 한국예총 충남, 대전·충남, 대전광역시연합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대전광역시의회 의장 대전광역시문화재단 자문위원장 국제 PEN클럽 회원(현재) 국제 PEN클럽 문화예술정책위원장(현재) 대전광역시 의정회장(현재) 한·중 문화교류회장(현재) (사)한국예술문화진흥회 이사장(현재) [저서] 수필집 : 『별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계룡로의 아침』 『내 마음의 꽃신』 『남계 조종국 예술혼 50년!』 『청산은 나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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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서문

나의 예술혼 50년!
지역문예 진흥에 묻다

나는 본시 역사의 고장 백제고도 부여태생으로 70평생을 살아오면서 어쩌면 나의 인생 50년,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지역문화발전에 몸 바쳐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날들의 그 감회가 새로워서 뒤를 돌아보게 되는구나!
나는 다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천자문과 소학을 배우면서 붓글씨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연필보다 붓을 잡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지금 아이들이 교과서 보고 쓰기를 반복하듯, 성현들의 명문장과 대가들의 명필을 따라 써보는 것이 당연한 일상생활의 하나였다. 지금부터 지나간 50년 세월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문화예술분야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각 분야에서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추진하고 결실을 맺어 왔는지!
참으로 지금 그 일들을 다시 하라면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선 많은 박수와 격려를 받기도 했지만 더러는 나의 굳은 의지와 열정과는 정반대로 심지어 객담(客談)에 가까운 소리도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가. 그런 가운데 열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추진했던 갖가지 활동들의 결과를 보면서 오늘에 이르러 많은 격려와 위로의 말들을 듣고 있으니 큰 보람과 기쁨으로 여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60년대 전매청 산하 엽연초(葉煙草)생산조합에서 공직생활에 이어 70년대 서울 신문사 공채 3기 사회부기자로 활동하면서 박정희 유신정권에 항거(抗拒)하는 강한 논조(論調)의 언론활동을 펼쳐왔다. 그런 까닭에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선포(유신정권유지)때 <사회불안 요인>제공이라는 이유로 대규모언론인 구속사건<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법률 위반>에 연루되어 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던 중, 1972년 8월 15일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그해 겨울 정든 고향 부여를 떠나 생활근거지를 대전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때 대전시는 충청남도의 일반 시로 인구가 약 50만 정도이었다. 정든 고향 부여를 떠나 대전에 이주한 뒤 나는 앞으로 나의 삶과 진로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서울 신문사 공채3기, 사회부기자로 입사해 가정 사정이 어려워 서울 근무를 고사하고 충남취재본부로 내려와 평소 지녀온 정론직필(正論直筆)을 좌우명으로 삼고 정의롭게 취재활동에 임했던 그 많은 기억들을 뒤로하고 평소에 당경(唐庚)이 쓴 고연명(古硯銘)을 읊어가며 문방사우(文房四友)와 가까이 해왔던 경험들을 되살려 붓글씨(書藝)에 집중, 정진해야 되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 해부터 소극적인 내면의 세계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자세로 몸을 가다듬고 서예공부를 본격적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기 시작했다.
젊은 나이로 패기가 넘쳤던 1972년, 나는 전서체(篆書體)로 유명했던 충남 홍성출신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선생에게 사사를 시작, 본격적으로 서예인생에 접어들게 되었다. 나는 정치적인 견해, 사회적 의무감, 현재 처한 현실에 대한 나름의 저항을 붓글씨(書藝)를 통해 담아냈고, 이제 삶의 일부가 됐다. 그 후 해마다 충청남도 미술대전과 대한민국 국전 등 각종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붓글씨(書藝)를 쓰는 사람으로서 많은 경륜을 쌓게 되었고 급기야 1984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영예스러운 <국전초대작가>로 지정을 받았다.

그러던 중, 당시 충남예총이 목적사업으로 해마다 개최하는 충청남도미술대전이 운영과 집행과정에서 여러 가지 난맥상을 드러내 지역의 각 언론과 예술인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때 젊은 패기로 바르지 못하게 운영되는 충남예총의 미술대전업무집행에 대하여 앞장서 개선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또 개진하는 열혈청년이 되었었다. 원칙과 정도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처럼 미술대전운영이 불합리하게 처리되는데 대하여 참지 못하고 시정을 요구해 온 사례들로 인해서 당시 충남예총의 10개 회원단체 예술인들로부터 많은 시선이 집중되고 이로 인해 지역문화발전에 대한 의견들로 자주 소통을 하게 되었고 이럴 때마다 미술대전의 발전방향에 대한 의견을 강력히 제시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에 대한 많은 예술인들이 나의 행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기 시작했다.

1986년도 2월, 충남 예총회장의 임기가 만료되어 새로 정기총회를 소집하고 회장을 선임하게 되었다. 당시 충남예총은 10개 회원단체로 회원들의 예총활동이 미온적인데다 문화 불모지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문화 환경이 열악한 지역이라는 혹평을 받아왔었다.

예총의 정기총회가 다가오니 그 책임을 맡으려는 선배 예술인들은 모두 사양하고 나를 보고 <젊은 패기를 지닌 사람이 예총을 맡아서 정상화 시켜라>하고 강력하게 요구들을 했다. 사실 그때 나는 예술단체를 맡는다거나 예술행정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한 바가 없었다. 그러던 중 숙고(熟考) 끝에 예총 10개 회원단체 각 분야의 예술인들이 강력히 권유도 하고 또 나 자신 젊음을 이 고장의 문예 진흥과 예술발전에 힘을 쏟는 것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문화 불모지라 불려오고 있는 우리고장의 부끄러운 오명을 깨끗이 씻어내고 척박한 문화 환경을 비옥한 토양으로 바꿔 놓는 일도 보람 있겠구나 하고 굳게 마음을 다짐하였다.

그래서 나는 충남 예총회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지고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그 때의 소박한 예총과의 인연이 22년 6개월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내 모든 열정을 지역발전과 문예 진흥에 쏟아낼 줄이야 어디 짐작이나 했겠나.

당시 예총을 맡고 보니 참으로 인생의 여정은 아마도 운명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충남 예총회장 3년, 대전시와 충청남도가 행정조직이 분리되어 이에 따른 예총조직의 합리적 운영을 위해 예총을 대전-충남예총으로 통합 운영하여 회장 3년, 대전 예총회장 13년 6개월과 중앙 예총부회장 16년, 감사 4년, 이사 2년, 실로 22년 6개월 동안이라는 오랜 세월을 명예직이면서 공휴일도 없이 예총업무에 정성을 다 쏟았다.

그리고 1989년 지방자치의 실현에 따라 지역문화발전과 지역고유의 특성 있는 문화예술 진흥을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사단법인 충청예술문화징흥회(현:한국예술문화진흥회)를 창립하여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법인설립 허가를 받아 현재까지 이사장직을 맡아오면서 온 정열을 다 쏟아 오고 있으니 나의 인생 50년을 모두 지역문화예술발전에 헌신해 온 셈이다.

당시 충남예총을 맡아보니 참으로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옆 창고 같은 건물에 사무실을 두고 전화 한대와 책상 두개가 놓여있을 뿐, 직원은 하나도 없었다. 당시 나는 예총회장을 잘못 맡은 게 아닌가하고 잠시 동안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맡아서 해야 할 일들이다. 나는 나의 모든 열과 정성을 다 바쳐 충남 예총의 새로운 위상을 되찾는데 최선을 다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먼저 급선무가 예총을 운영하기 위한 사무직원을 채용하고 운영경상비를 확보하는 일이 최급선무였다. 당시 충청남도로부터는 행사지원금으로 <충청남도미술대전> 외에 경상운영비 등 일체의 지원은 한 푼도 없었다. 그리고 행사비 지원마저 담당공무원 책임자에 따라 천차만별로 정해져 있어 그야말로 사무실 하나 운영, 유지하기조차 힘든 참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실정에 나는 좌절하지 않고 관련된 중앙 관계부처를 발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정부로부터 전국 127개 지방예총과 각 시·군문화원을 정부정액보조단체 지정을 이끌어내는 쾌거를 올렸다. 이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예총과 문화원에 상응하는 경상운영비 보조지원을 받도록 실현함으로써 다소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전국 지방예총과 지방문화원의 운영에 숨통을 트이게 하고 지방문화의 균형발전에 큰 기틀을 만들어 냈다.

그 당시 지령인걸의 고장이라 일컬어 온 우리 충청도라 하지만 중앙부처에는 타 시도에 비해 고위공직에 있는 인사들이 극히 소수였었다. 거기에 인맥까지 부족한 서생(書生)인 나는 불철주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이면사를 늦게나마 이야기로 남기게 되고 재삼 비쳐지게 되니 큰 보람과 함께 남은 생도 지역문화발전과 문예진흥에 더욱 최선을 다해야 되겠다는 다짐과 함께 새로운 각오와 굳은 의지가 앞을 가린다.
회고해 보면 설상가상으로 당시 이 고장 예총의 위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예술인들 사이에도 예총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무슨 일을 해왔는지 관심조차 없는 예술인들이 부지기수이었다. 이러한 문화 환경 속에 나는 중앙에 집중된 문화예술의 지방 확산과 균형발전을 위해 더욱 과감하게 예총활동을 펼쳐야 되겠다고 다짐하고 국내 정상의 예술단을 해마다 초청하여 봄가을로 공연하는 일을 적극 추진하였다. 흔히들 대전은 문화 불모지라는 자조적인 말들을 하루 속히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전국의 다른 광역시, 도 수준으로 시민들의 문화 향유 층을 높여야 한다는 사명감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예총회장 취임 첫해에 겁도 없이 부산시향을 초청하여 공연을 펼쳤는가 하면 다음해부터 연례행사로 계속 광주시향. 대구시향. 인천시향. 그리고 당시 전국적으로 각광을 받았던 유명한 국내정상의 무용예술단도 초청해 공연을 펼쳤다. 당시 충남과 대전예총의 여건으로 이들 국내정상의 예술단을 초청하여 공연을 펼쳤다는 것이 결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 국내정상 예술단 초청에 따른 여러 가지 행정적 절차는 물론, 초청경비 조달과 관람권 판매 등, 그 어느 것 하나 어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동분서주하며 과감하게 해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예술향유의 기회를 넓혀주고 문화성층을 향상시켰다. 지금 같으면 과연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었을까!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또 우리 고장 예술인들에게 자존심과 자긍심을 갖게 하고 예술인들의 창작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연, 전시행사를 정기적으로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경험과 각종 공연, 전시를 통하여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그 간의 충청남도 미술대전을 내실 있게 운영해 자리를 잡게 해온 것을 바탕으로 1987년<충청남도 산업미술대전>과 1989년<백제사진대전>, 1989년<대전광역시서예대전>, 1989년<충청서예가전>, 1987년<전국연극제> <전국무용제>, 1989년<대전광역시산업미술대전> 등 각종 공연과 전시회를 창설하여 정착시켜 놓은 다음 이 모든 공연전시행사들을 목적사업으로 자리 잡아 예총산하 각 관련 회원단체에 이관시켜 오늘의 다양한 전시회로 발전시켜 가도록 하였고 1987년 제16회 충청남도미술대전에서는 제1회부터 16회까지 역대 충청남도 미술대전의 입상자 등을 총 정리하여 <1987년 충청남도미술대전> 도록을 발간해 향토미술 사료로 남긴 것은 지금 생각해도 큰 보람과 자부심이 아닐 수 없을 일이었다. 또한 우리고장 합창음악 발전을 위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상합창제>를 창설하여 지금까지 개최토록 해온 일과 <대전청소년 교향악단>을 창단하여 10년간 단장으로 있으면서 봄가을 정기공연 등 연주활동을 지원해 대전음악의 저변확대와 위상을 제고시켜 왔고, 당시 참여했던 단원들이 연주활동을 통한 음악역량을 향상시키고 발전시킨 경륜으로 현재 한국 음악예술계에 중진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지금도 큰 보람으로 남고 있다.

당시 충남과 대전예총이 추진해야 할 산적한 예술 목적사업 중, 우선순위에 따라 추진한 발간물로 1986년 <충남예술>과 1987년 <충남의 구비전승>, 1989년 <대전예술>, 1990년<충남의 풍속>, 1991년 <충남의 민요집>, 2000년<대전의 시 대전의 노래>, 2001년<충남문학사> 등 책을 발간하여 우리고장 전통을 계승하는 주춧돌로 만들어 사료로 남겨온 것 또한 잊을 수 없는 문화 사업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제목만으로 기술해 정리하기에는 간단한 것 같지만 그 일들을 하나하나 추진하는 과정에는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 지면에 통해 하나하나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 또한 언젠가는 기회가 되면 더 자세히 이면사를 남겨서 다음날 우리 예총과 지역 문화예술진흥을 위해 많은 관심을 쏟는 예술인과 문화촉매자들에게 참고가 되도록 할 예정이다.

나는 예총회장과 한국예술문화진흥회 이사장의 책임을 맡자마자 위에 두서없이 기술한 대로 예술분야의 목적사업들을 시대적 배경과 절차후에 따라 하나하나 우선순위를 가려 선정된 사업들을 적극 추진, 시행하고 각종 종합예술 기관지의 발간을 추진하여 오늘에 이른 점이다. 당시 예총은 1960년대 창립된 이후 20년이나 흘렀지만 그 간의 예술 활동이나 기록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에는 지역의 열악한 문화 환경에 따른 여건으로 예술인들의 생각이나 연구물을 발표할 지면과 공간이 없어 많은 애로가 있었다. 따라서 격월간, 계간 등 예술정보지의 발간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잡지를 하나 창간하여 지속적으로 발간한다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이 일을 위하여 넉넉하지 않은 집안 예총살림에서 도저히 추진할 수 없어 사재를 들여 예총활동에 투자를 하는 일마저도 한계를 느껴 마음이 늘 편치 않았던 게 사실이다. 처음에는 격월간으로 <충남예술>을 발행해 오다 예총이 충청남도와 대전시가 행정조직이 분리됨에 따라 예총이 대전·충남예총으로 조직이 재편되어 재정형편이 어려워 발간하지 못한 <충남예술>을 당시 지방자치의 실현으로 지역고유의 특성 있는 문화발전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하고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충청예술문화진흥회(현:한국예술문화진흥회)에서 사재를 출연해 격월간 <대전예술>을 4년 8개월(제58집) 동안 발간해 왔다.

온갖 열정으로 발간해온 <대전예술>을 아무 조건 없이 출판물 발행 사업권을 흔쾌히 대전예총으로 이관시켜 줬으며 이 종합 예술지는 현재까지 대전 예총에서 발행토록 한 결과 역시 큰 명분과 보람으로 남아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이제는 그 누가 예총의 책임을 맡아도 이 월간 종합예술지<대전예술>은 지속적으로 발간되어갈 것이며 폐간할 수 없는 종합예술지로 거듭 발전해 갈 것이다. 물론 행정개편에 따라 처음에는 <충남예술>로 발간을 해오다 이어진 <대전예술>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여기에 나의 땀과 눈물과 열정이 서려있어 그 감회가 깊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오랜 기간 예총과 진흥회의 한·중 문화교류회 책임을 맡아 온 지난 세월을 하나하나 더듬어 살펴보니 참으로 많은 예술행사를 추진하기도 하고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전국 지방예총의 중앙부회장으로 지방예총의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서 1986년<전국예총지회장회의>를 창설하고 대전에서 127개 지방예총회장 전체회의를 주관, 문화예술의 지방 확산과 균형발전을 위한 세미나 등 개최하고 단합을 다짐해 온 일들이 단초가 되어 중앙 예총에서는 뒤늦게 같은 해 이를 <전국예총대표자대회>로 격상시켜 연례행사로 개최하고 한 해 동안 예술 활동에 현저하게 공적이 많은 회원들에게 예술인 대상과 예술신인상, 공로상. 감사패 등을 시상하고 예술인들의 자긍심을 높여오는 일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으며 1987년<문화의 달 예술인대회>를 창설, 우리고장 예술인들의 자긍심과 권익을 높여오고 대한민국 국전 등 각종 예술행사에 심사위원, 추진위원, 운영위원, 기타 사회단체에 적극 참여하여 예총의 위상을 확보했던 일, 그리고 무엇보다 1988년 <충청미술청년작가전>. 1990년 충청서예가전(예술의 전당). 1995년 충남 개도 100주년 기념 충남서예가전. 1995년~2016년 한·중(대전·남경) 서화교류전. 2013년~2014년 한·중(대전·합비) 서화교류전. 2014년~2015년 한·중(대전·소주) 당대서화명가전. 2016년~2017년 한·중(대전·소주-성도) 당대서화명가전. 2017년~2018년 한·중(대전·우한) 서화교류전 등 나의 전공과 관련된 예술행사를 창설하고 주도해 온 일들은 큰 보람으로 남아 가슴 벅차게 하고 있다. 이처럼 분주한 예총활동과 한국예술문화진흥회 활동 속에서도 나의 붓글씨(書藝)에 쏟는 열정을 잠재우지 않고 개인전과 초대전, 그룹 전, 세계 아트전 등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온 일, 또 1989년 한국수필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 수필집으로 1991년 <별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1994년<계룡로의 아침>. 2017년 <내 마음의 꽃신>등 3권을 남긴 것도 큰 보람이라 여기고 있으며 이러한 연유로 2017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문화정책위원장의 큰 감투까지 쓰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처럼 예총과 각 문화단체의 문화예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지역사회 각 분야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예총활동이 연계되어 광폭으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 일환으로 우리지역 공동체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1991년 우리지역 연고의 프로야구 한화이글스 후원회를 창설, 2010년까지 20년 동안 후원회장 직을 맡아오면서 선수단을 격려하고 MVP시상과 주간, 월간 우수선수 시상 등, 후원활동을 적극 펼쳐 온 보람으로 충청지역 연고의 프로야구 발전은 물론 그 결과 1999년 한화 이글스가 전국을 제패하고 우승하는 영광도 맛보았으며 예술인으로 1989년 대전광역시 카누협회장, 1996년 대전광역시 야구협회장직까지 맡아 지역체육 발전에도 크게 기여해온 일 등, 나의 지역사회 활동무대는 점점 넓어지게 되었다.

특히 대전예총회장과 한국예술문화진흥회 이사장직에 있으면서 1994년 대전광역시와 중국 강소성 인민정부 남경시와의 자매결연을 체결할 당시 대전광역시 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당시에는 국제간 문화교류의 트랜트가 중앙정부중심에서 지방정부로 옮겨가는 추세였다. 이러한 추세에 앞장서 나는 중국 남경시 정부 산하 남경서화 원 주도평(朱道平) 원장과 긴밀한 협상을 통해 대전·남경 양 도시 간 우호증진을 위한 문화교류행사로 한·중(대전·남경)서화교류전을 개최하기로 합의하고 이듬해인 1995년 11월 대전에서 한·중 문화교류회(현·한국예술문화진흥회)주최로 제1차 한·중(대전·남경)서화교류전을 시작으로 2018년까지 23년 동안 문화적, 정서적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한해도 쉬지 않고 성대하게 개최해 왔다.

대전·남경 자매도시 간의 문화교류행사인 이 한·중(대전·남경)서화교류전은 상호주의 원칙 아래 참여하는 서화예술인들이 해마다 양 도시를 상호방문, 해마다 성공적으로 개최해 왔다. 그리고 1988년에는 자매도시 남경시 인민정부에서 개최하는 민간예술절행사와 세계역사문화명성도시엑스포 등 국제적인 대규모 예술행사 개막식에 우리 대전의 전통예술단(대전광역시풍물단)이 공식초청을 받고 개막식과 폐막식 공연에 출연, 우리 고유의 전통예술로 대전의 명예와 이미지 그리고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선양해 온 일은 23여 년 동안 함께 참여했던 서화 예술인과 공연예술인들도 자부심과 함께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이처럼 중국 남경시와 오랜 기간 깊은 신뢰 속에 이어져온 서화교류전이 중국 각 지역으로 여론이 확산돼 강소성 인민정부 남경시는 물론, 안휘성 합비시, 호북성 우한시, 강소성 소주시, 사천성 성도시, 호북성 우한시 등 많은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대전과 교류를 절대 희망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근자에 이르러 우리의 현실과 여건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과의 문화적, 정서적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는데다 아무리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해 간다 하더라도 순수 민간예술단체로는 재정적 뒷받침이 없이 정상교류를 추진하고 이를 시행해 나가기는 그리 녹록치 않은 실정이다. 따라서 향후 이러한 국제교류를 추진하는 예술단체의 각종 문화교류 사업은 정부와 관계당국에서 심도 있게 분석하고 검토하여 특별한 예산지원정책이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과 중국과의 우호관계의 중요성을 예로 하나 들어 본다. 지난 2016년 5월 초이다. 중국 강소성(江蘇省)인민정부 스타이펑 성장이 4박 5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대대적인 언론보도에는 방한기간 중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과 구본무, 최태원 회장 등 재벌 총수들을 면담하고 한국기업 주요공장들을 돌아볼 계획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삼성과 현대, SK, LG 등 국내 4대 그룹 회장들은 한국을 찾는 스타이펑 성장을 영접하랴 연휴기간인데도 쉬지 못하고 그를 만나려 총 출동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그 주인공인 스타이펑 성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리커창 국무원 총리도 아니다. 그동안 중국에서 국가주석이나 총리 같은 중앙정부 최고위급 인사가 한국을 찾을 때 재벌 총수들이 줄지어 만나기는 했지만 지방 성(省)단위 수장까지 일일이 만난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스타이펑 성장은 장쑤성의 1인자도 아니고, 당서기 다음인 2인자다. 중국 공산당 내 파워 엘리트그룹인 중앙위원도 아니다. 웬만한 국가의 정상도 보기 힘든 그룹총수들이 중국 지방정부의 2인자를 만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장쑤성이 한국 경제발전에 전략적 가치를 지닌 지역이기 때문이다. 장쑤성은 면적이 중국 전체의 1% 남짓하지만 ‘경제 허브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GDP(국내총생산) 규모가 중국 31개 성, 시, 자치구에서 광동성에 이어 2위다. 대(對)한국과의 교역량도 2위다. 강소성에는 한국의 4대 그룹을 포함해 우리 기업 상당수가 생산 거점을 두고 있다. 양자강을 끼고 있어 물류유통이 편리하고 상하이가 인접해 배후시장도 크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쑤저우에 반도체 공장이 있고, 기아자동차와 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은 무석에서 가동 중이며 LG의 경우 난징에서 디스플레이, 화학 두 계열사가 생산 라인을 돌리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여건 속에 대전시는 1992년 한·중 국교정상화 이후 1994년 전국지방자치단체로는 제일 먼저 중국 강소성의 성도 남경시와 자매도시를 결연했다. 이에 발맞춰 (사)한국예술문화진흥회(한-중 문화교류회)는 남경시 인민정부의 남경서화원과 남경시문학예술계연합회, 두 예술단체와 문화교류로 한-중(대전-남경)서화교류전을 개최하고, 지난해까지 23년 동안 한해도 쉬지 않고 교류전을 성대하게 개최해왔다.
한·중 양국 간 우호증진을 위한 교류의 물꼬는 우선 경제교류에 앞서 동양예술장르 중 제일인 서화예술교류를 통한 문화교류를 계기로 많은 우리 기업들까지 중국에 진출케 하는 문화적, 정서적 디딤돌이 되었고, 현재에 와서는 한-중 FTA 타결 등 외교적으로 많은 현안들을 풀어가는 단초가 바로 문화예술에 있다는 것과 정치와 경제의 문제는 문화의 영역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모든 문제를 같은 시각만으로 접근하는 것은 올바른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한·중(대전·남경) 뿐만 아니라 여타의 관련도시 간의 문화교류는 총체적인 정치, 경제, 사회적인 많은 문제들을 풀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중요한 해법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016년은 대전-남경 자매도시결연 22주년을 맞는 해로 대전시의회와 남경 시 인민대표자대회와는 의정교류 16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이러한 오랜 기간의 우호협력 속에 9월, 대전에서 제21차 한-중(대전·남경)서화교류전도 개최해 왔다.

중국의 경우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문화 환경이 한국과는 너무나 차이가 많은 현실로 예술인들은 국가와 기업메세나의 풍족한 지원으로 예술인육성은 물론 예술 활동과 각종 문화교류를 실시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의 경우 민간예술단체가 국가와 자치단체의 예산지원으로 교류행사를 치르기는 정말 하늘의 별 따기다. 2015년의 경우다. 지역문화발전에 헌신 기여해 온 우리 대전미술인들의 뜨거운 열정이 모아져 해마다 대전시로부터 예산지원(약70%)을 받아 시행해온 한·중(대전·남경)서화교류전의 지원예산이 전액 삭감되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한·중 우호관계의 중요성과 양국 간 오랜 기간 깊은 신뢰 속에 이어져 온 교류행사라 교류전예산이 한 푼 없는 상황에도 사비를 털어 중국 남경에 20명의 대표단과 90명 작가들이 교류전에 참여, 수준 높은 작품으로 경연을 펼치고 이를 통해 한국의 명예와 대전의 이미지를 크게 선양한바 있다. 그 다음해인 2016년 9월, 대전에서 개최하는 제21차 한-중(대전-남경)서화교류전은 예산지원이 확정되어 교류전을 성대하게 개최할 수 있었다. 중앙정부나 관련 지방자치단체도 기업총수들처럼 한·중 관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강력한 교류확대 증진을 위해 특별한 행정력과 현실에 맞는 예산지원이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세월이 지난 일들이다. 1996년 문화예술계에서도 지방자치의 실현에 발맞춰 지방의회에 진출하여 지역문화발전과 문예 진흥에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와 절대적인 권유로 1996년부터 제2~3대 대전광역시의회 의원선거에 출마, 당선되어 부의장과 의장을 맡아 봉사하는 기회도 있었다. 예술인으로 의정의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내가 관여해온 예술계로서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동료 의원들은 물론 공직자들에게 예술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된다. 나는 시민들의 문화성층 고양과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문화 예술단체 지원에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역설하고 실제 재임 기간 중, 예총과 문화원, 그리고 10개 예총 회원단체에 상응하는 예산의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의정 활동을 펼쳤으며 한밭문화제를 비롯해 각종 예술행사에 상향지원 되도록 노력하여 큰 성과를 얻었다. 특히 재임기간 중에 예산출연을 성사시켜 50억 원의 문예 진흥기금을 조성케 한 일은 예술인으로서 또 예총의 책임자로서 예술단체 활동에 가장 잊을 수 없는 보람으로 남게 되었다.

오늘에 이르러 나의 가슴에 더 큰 보람을 안겨주는 사건이 나의 가슴을 벅차게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영화산업은 세계시장에서 경제적인 대호황을 이루고 크게 성장하고 있다. 나는 2006년 2월 19일 오후 3시, 대전의 젊은이들 거리인 은행동(으능정이)에서 혼자 당당하게 소리를 지르고 장엄하게 섰었다. 대전의 으능정이는 서울로 치면 광화문이나 명동과 같은 넓은 번화가이다. 당시 광화문에서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1인 릴레이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날 으능정이 거리에서 <스크린 쿼터 문화주권 사수> 내용을 담은 피켓을 높이 들었다. 미국이 한국의 영화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술책을 강력히 반대하고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논의를 지켜볼 수만 없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오게 된 것이다. 1인 시위를 벌인 나는 <영화산업은 앞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산업>이라 강조하고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는 으능정이 거리를 택해 1인 시위를 벌인 것이다. 당시 나는 <미국은 막대한 자금력과 영화기술에다, 힘으로 우리의 영화시장을 독점하려한다>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정부가 FTA 협상과는 별개라는 빌미로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세운 것은 미국의 힘에 굴복한 것>이라고 항변했었다. 서울 광화문에서도 같은 날 배우 안성기를 시작으로 박중훈, 장동건, 최민식, 전도연, 김주역, 이준기 등이 스크린쿼터축소 반대 1인 릴레이시위에 참여했었다. 또 영화감독으로는 정윤철, 이준익, 송일권, 박찬욱 감독이 나섰으며 영화배우 방은진 씨도 14번째로 1인 시위를 벌였었다. 당시 나는 최고령의 나이로 이번 스크린쿼터와 관련한 1인 시위로 기록을 남긴 것이다. 당시 언론 보도에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올해 대학에 입학했다>며 큰 소리로 <나이는 비록 60대이지만 마음은 20대>라고 소리쳐 말했던 순간들이 새롭게 상기되고 있다. 서예가로 일가를 이룬?나는 지난해 2개의 대학에 동시에 합격을 하고 입학은 최종적으로 대전대 산업광고심리학과를 선택했다. 그 해 3월, 아들 벌되는 새내기들과 같이 입학식을 가졌다. 그리고 또 대전예총에서는 유성 로-얄 관광호텔에서 정기총회를 열고 10개 회원단체에서 참석한 53명의 대의원들이 <스크린쿼터축소 결사반대(사수)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전국 각 시. 도 에서 앞장서 먼저 대전예술인들이 스크린쿼터 결사반대 사수에 동참했다. 이날 참석한 건축, 국악, 무용, 문인, 미술, 사진, 연극, 연예, 영화, 음악협회 등 10개 회원단체 대의원들은 한결같이 <한국영화 죽이기를 즉각 중단하라>고 외쳤고 <한국영화와 문화주권을 지켜내기 위해 전면적이고 광범위한 투쟁을 벌여나갈 것>을 선언했던 일들은 오늘의 한국영화 1천만 관중시대를 열어 가는데 그 단초가 되었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을 벅차게 하는 순간이다.

지난 50여 년 동안 작품 활동과 문화(촉매)활동, 사회활동, 지역공동체 활동을 해오는 동안 나라와 지역을 빛낸 선인들의 민족정신과 자긍심을 기리는 기념비 제작에 특별한 열정을 쏟아 사육신 박팽년선생 유허비, 만해 한용운선생 시비, 단재 신채호선생 비, 수당 이규남선생 순절비, 정 훈 선생 시비, 한성기 선생 시비, 권선근선생 비, 이덕영 선생 시비, 박용래 선생 시비, 대전 국립현충원 추모비, ’93대전엑스포의 역사적인 성공을 기리는 한빛탑 건립기, 인공위성 우리별1호 발사 기념비(대덕연구단지). 백제재현단지 사비궁내 현판 弘毅堂(홍의당) 등, 민족의 자긍심과 감동을 쏟아 담은 작품을 남겼으며 이러한 활동들로 1983년 충청남도 문화상, 1990년 서울신문사 향토문화대상본상, 2000년 자랑스러운 부여인상, 2006년 대전광역시문화상, 2008년 중국남경시 인민정부 문학예술계연합회(문련) 영예고문, 2013년 시사저널 올해의 신한국인 대상, 2014년 부여 100년을 빛낸 인물상, 2014년 중국남경 시 인민정부 남경 시 대외문화교류사자 상, 2014년 중국강소성 인민정부 강소성을 빛낸 인물상 등 상훈에 흔적을 남기게 되는 영광도 얻게 되었다.

글을 쓰다 보니 자화자찬이 된 감이 없지 않아 다소 계면쩍은 생각이 들지만 내 인생 전부를 걸다시피한 예총과 (사)한국예술문화진흥희(한·중문화교류회)의 일들을 생각하니 글로 이렇게 쓰여졌음을 보는 이로 하여금 이해해 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런 일들을 추진하는데 어찌 이 부족한 나의 역량으로만 가능했겠는가? 참으로 많은 분들의 사랑과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잘 알기에 그 모든 분들에게 늦은 감이 있으나 이 지면으로나마 깊은 마음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의 50평생 예술혼(藝術魂)이 살아 녹아 있는 사랑하는 한국예총과 충남예총, 대전예총, (사)한국예술문화진흥회, 한·중문화교류회를 비롯한 이 고장 문화예술계의 영원한 발전을 충심으로 기원한다.

그러나 졸작이지만 큰 용기로 출간 합니다.
시조의 한 소절, 아름다운 시어 한 단어라도 독자들의 마음에 남길 수 있다면 큰 기쁨이고 보람으로 알겠습니다.

끝으로 시조집을 발간하는데 평설을 써주신 이도현 원로 시인께 정중한 감사와 많은 도움을 주신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2018년 봄
청운 유 희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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