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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와 맥아더

히로히토와 맥아더

(일본의 ‘전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도요시타 나라히코 (지은이), 권혁태 (옮긴이)
  |  
개마고원
2009-07-27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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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와 맥아더

책 정보

· 제목 : 히로히토와 맥아더 (일본의 ‘전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일본사 > 일본사 일반
· ISBN : 9788957691007
· 쪽수 : 296쪽

책 소개

힘없는 목소리로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전한 히로히토와, 파이프를 비스듬히 문 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모습의 맥아더. 이 책은 이렇게 다소 막연한 이미지로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두 사람의 정치적 ‘거래 관계’를 밝혀낸 일본 학자의 연구서다.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들어가는 말


1장 ‘맥아더.히로히토 회담’의 역사적 위치

1. 제1차 회담의 검증
『맥아더 회고록』은 과연 ‘사실’인가?
모든 책임을 도조 히데키에게 전가한 히로히토? ― ‘도조 문제’와 그 배경
내무성이 회담 내용을 ‘설명’하다
펠러스 메모
맥아더의 ‘회답’
히로히토의 면책을 위해 움직인 조지프 키넌과 다나카 류키치
바이닝의 일기와 시게미쓰의 「수기」
후지타 히사노리의 『시종장의 회상』
오쿠무라 가쓰조의 「수기」
영국 왕에게 보낸 ‘친서’
한 가지 ‘결론’

2. ‘공백’의 전후사
흔들리는 맥아더의 지위 ― 워싱턴과의 대립
점령관리체제의 특이성
맥아더의 권한 문제
아이젠하워와 이탈리아 국왕
4차 회담과 ‘오키나와 메시지’
히로히토는 헌법을 무시했는가? ― 히로히토의 헌법 감각
히로히토의 헌법 위반은 ‘터부’? ― 동시대사의 특이한 ‘공백’

2장 히로히토와 ‘도조 비난’
『맥아더 회고록』에 대한 의문
마쓰오 다카요시 논문의 ‘추측’
공개된 『회견록』
클럭혼에 대한 ‘회답 정문’
히로히토의 ‘리얼리즘’

3장 「마쓰이 문서」의 회담 기록을 풀어 헤친다
「마쓰이 문서」와 그 배경
1차 회담(1945년 9월 27일)
2차 회담(1946년 5월 31일)
3차 회담(1946년 10월 16일)
4차 회담(1947년 5월 6일)
마쓰이, 통역으로 발탁되다
9차 회담(1949년 11월 26일)
10차 회담(1950년 4월 18일)
11차 회담(1951년 4월 15일)
리지웨이?히로히토 회담
「마쓰이 문서」에서 드러난 히로히토 상像

4장 전후체제의 형성과 히로히토
이탈리아 점령과 히로히토
극동위원회 설치의 배경
『안보조약의 성립』을 둘러싸고
‘천황외교’의 전개
「마쓰이 문서」와 회담 기록
히로히토의 헌법 인식
히로히토와 ‘야스쿠니 문제’


후기

옮긴이 해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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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도요시타 나라히코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45년 일본 고베(神戶) 효고(兵庫) 현에서 태어나 교토(京都)대학 법학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학교 법학부 조수, 조교수,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법학부 교수를 거쳐, 2000년부터 간사이가쿠인(?西?院)대학 법학부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イタリア占領史序? ― ?後外交の起点』, 『日本占領管理體制の成立 ― 比較占領史序?』, 『安保?約の成立 ― 吉田外交と天皇外交』, 『パワ??ポリティクスと日本外交』, 『集團的自衛?とは何か』가 있고, 같이 지은 책으로 『安保?約の論理  ― その生成と展開』, 『占領改革の?際比較』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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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태 (옮긴이)    정보 더보기
1959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야마구치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성공회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릿쿄대학 초빙 연구원, 규슈대학 대학원 초빙 교수를 지냈고, 계간 『황해문화』의 편집위원이다. 「재일조선인과 한국 사회」, 「1960년대 단카이 세대의 반란과 미디어로서의 만화」 등의 논문과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아시아의 시민사회』(공저), 『동아시아 인권의 새로운 탐색』(공저), 『반일과 동아시아』(공저), 『한·중·일 3국의 8·15 기억』(공저) 등의 책을 썼으며, 『히로히토와 맥아더』를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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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렇다면 일본 점령의 최고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히로히토는 점령 정책을 수행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존재로 자리매김되었을까? 맥아더는 히로히토와 1차 회담에서 종전 시에 히로히토가 내린 '영단英斷'을 높이 평가했다. "성단이 한번 내려져 일본 군대도 일본 국민도 모두 정연하게 이에 따르니 그 모습이 훌륭하다"며 히로히토 앞에서 "명령을 하나하나 충실히 실행하고도 남음이 없다"고 절찬한다. 나아가서는 일본과 일본 국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로서 히로히토에게 점령정책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 즉,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미군 진주가 원활하게 진행된 결정적인 계기가 천황 히로히토의 '권위'에 있다고 맥아더는 본것이다. 그래서 점령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맥아더는 그 '권위'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히로히토가 "모든 책임 발언"을 했는지 여부는 완전히 부차적인 문제이다. 맥아더가 무엇보다도 '감동'해야 할 지점은 히로히토가 "포츠담선언을 정확히 이행하고 싶다"고 확약한 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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