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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58450900
· 쪽수 : 192쪽
책 소개
목차
序文
옮긴이의 글
제1장 도기의 연구 및 본 연구에 대해
1. 도기의 양부(良否) 판단
2. 도기 제조상의 상식
3. 옛날 가마터의 연구
4. 역사적 문화 흔적과 도자기 파편의 연구
5. 역사적 문헌의 조사
6. 옛날부터 전해오는 확실한 것을 볼 것
제2장 조선 다완의 특징
제3장 대마도와 조선의 관계
제4장 부산의 왜관
제5장 부산요에 대하여
1. 부산요의 경로와 경과
2. 부산 번조소(燔造所)
3. 번조소(燔造所)의 위치
4. 부산요의 도공
5. 부산요에서 사용한 태토
6. 왜관 관련 다완
7. 소우케(宗家)의 소장품에 대하여
제6장 도공 모산(茂山)의 이야기
제7장 대주요(對州窯)에 대하여
1. 대주요(對州窯)
2. 대마도의 가마 흔적과 도공
1) 코우라 사라야마(小浦皿山) 가마
2) 쿠다(久田) 가마
3) 시카야키(志賀燒) 가마
4) 타테가메(立龜) 가마
5) 아수(阿須) 가마
6) 코우라(小浦) 가마
3. 대주요(對州窯)의 특징
4. 요시다 마다이치(吉田又市) 및 자손
☞ 삽화 목차
1. 조선 다완(朝鮮茶碗) 織部好·遠州好 옵셋
2. 조선 전도(朝鮮全道)의 고지도
3. 조선 고지도 사국접해도(四國接海圖)
4. 조선 고지도
5. 조선 고지도 삼도(三島) 부근
6. 통신사 편선의 그림
右上 접시꽃(葵) 문양의 고자부네(御座船)
左上 마쓰다이라 아키(松平安藝) 수호(守護)의 고자부네(御座船)
右下 오사카에 있는 대마도 번소(番所)
左下 조선의 사선(使船)
7. 통신사 행렬 일부
8. 마상재
9. 대마도 명소
10. 조선통신사 행렬도
11. 왜관(倭館) 가마 판화
12. 왜관(倭館) 가마 목판
13. 오늘날 부산 왜관 위치
14. 부산 왜관의 도면
15. 나가사키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
16. 양산 부근에서 발견한 파편
17. 부산 왜관의 평면 약도
18. 통사가 읽은 조선 소설
19. 왜인 구청등록(求請謄錄) 다완 번조(燔造)의 건
20. 왜인 구청등록(求請謄錄) 소우 요시자네(宗義眞) 구청서
21. 22. 왜인 구청등록(求請謄錄) 소우 요시미치(宗義方) 구청서
23. 왜인 구청등록(求請謄錄) 소우케(宗家) 가신의 구청서
24. 25. 26. 야헤이타(彌平太)가 왜관에서 관수와 동래부의 논란
27. 첩해신어(捷解新語)
28. 부산요에서 사용한 태토 채취 장소
29. 소우케(宗家) 소장의 작자 기억도
30. 판사(判事) 다완
31. 고키(吳器) 다완
32. 린사이(林齋) 작품 시로데(白手) 다완
33. 부산요 초기의 청자 다완
34. 에고혼(繪御本)
35. 스나데고혼(砂手御本)
36. 모산(茂山)의 소메쓰케 무코즈케(染附向附)
37. 고혼운카쿠(御本雲鶴) 다완
38. 고혼(御本) 다완
39. 에가라쓰(繪唐津靴形) 구두 모양 다완
40. 야헤이타 묘석(彌平太墓石)
41. 대마도의 가마 흔적
42. 대마도 시카(志賀) 가마의 파편
43. 44. 대마도 타테가메(立龜) 가마 소메쓰케(染附) 미즈사시(水差)
45. 46. 쿠다(久田) 가마 케이사쿠(惠作)의 미즈사시(水差)
47. 코우라(小浦) 가마 고혼(御本) 복제 다완
48. 코우라(小浦) 가마 모산(茂山) 복제 다완
책속에서
임진왜란 후 도쿠가와 막부는 소우케(宗家)를 통해 견본을 보내 조선 도공에게 도기를 만들도록 했다. 그 후 도쿠가와 막부의 요청으로 소우케(宗家)가 부산에 가마를 만들었다. 조선 도공도 함께 도기를 만들었는데, 좋은 기물이 있는가 하면 본질과는 거리가 먼 기물도 있었다.
동시에 용도에서는 그 시대 일본의 취향을 대표하고 있었으므로, 일종의 도쿠가와 초기 공예, 일본 초기의 여러 가마와 닮은 곳도 있었다. 이를 명확하게 하는 것은 다인, 소위 조선 다완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임과 동시에 일본 초기의 가마예술과의 관계를 매듭짓는 일이다.
도기는 사용자에 의해 제작상의 목적을 완성한다. 때문에 사용자가 그 아름다움의 완성에 참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오랜 시간 곁에 두고 손에 익으면 그 아름다움에 익숙해지는데, 조선 다완의 아름다움은 일본 다인들이 즐겨 사용하여 진가(眞價)를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부산요에도 위기가 닥쳤다. 1639년에 문을 열어 약 80년간 유지된 부산요는 태토 및 연료 공급의 교섭이 난항을 거듭하여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조선에서 공급한 태토 및 부산으로 건너간 다수의 도공, 수많은 작품 등은 직간접적으로 일본 초기의 도기 산업에 기여했다. 또한 오늘날 일본에 건너온 고려 다완이라 하는 것 중에서도 대다수가 부산요의 제품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마도는 조·일 양국 사이에서 국교재개의 매개역할에 난항을 겪었다. 더구나 임진·정유란의 원한이 뼛속까지 사무친 장벽을 허물기 위한 대마도의 고충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더욱 대마도는 식량이 부족하여 조선에서 공작미 1만 5천 석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일 양국의 궁극적 목적은 각자 체면을 유지하면서 국교를 회복하는 데 있었지만, 대마도는 먹을거리를 요구하는 데 있었다.
말하자면 ‘떡 줄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큰소리’치는 격이었다. 옛날 텐표(天平) 시대에 동국(일본)에서 국경수비대를 보내면서 양식을 쓰쿠시(筑紫)에서 보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