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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라이트 노벨 > 앨리스 노벨
· ISBN : 9788960524361
· 쪽수 : 322쪽
책 소개
목차
[서장] 그들은 바란다, 원수로 사랑할 신부를
[제1장] 초하루의 신부
[제2장] 음란한 밤과 두 달
[제3장] 상현달이 범하면
[제4장] 만월에 미쳐
[제5장] 그믐의 연회
[종장] 그들은 원한다, 끔찍이 사랑할 신부를
작가 후기
역자 후기
리뷰
책속에서
저녁놀이 온화하게 청년의 뺨을 어루만졌다.
요즈음의 서양풍 건축물과는 비교되지 않는, 옛 절 같은 정취가 있는 건물을 등지고 그는 손에 든 서적을 펄럭 넘겼다. 발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설은 지금까지 그가 읽은 적 없는 문체로 쓰여 있었고, 이미 두세 번 훑어보았으나 아직 흥미가 식지 않았다. 내향적인 청년이 몸을 의탁한 도쿄의 저택에서, 응석받이지만 똑똑하고 아름다운 소녀에게 매혹되어 가는 모습은 압권이다.
그는 아름다운 정원을 훌쩍 걸었다가 멈추어 서서, 책장을 넘겨 몇 행을 읽고 허공에 눈길을 주었다.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긴 했으나, 때때로 툇마루를 지나는 하녀들은, 가장인 청년의 평소와 같은 행동거지를 보고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만히 발소리를 죽였다.
메이지 유신 후, 남성들이 그다지 입지 않게 된 소메코몬(染小紋)을 굳이 입은 청년은 하오리(羽織)를 어깨에 걸치고 정원을 흐느적거리듯이 걸었다. 목적을 알 수 없는 시간이 약간 지난 뒤, 별안간 그 발이 멈춘 건 정원의 나무들 틈새에서 인력거 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족히 천 평은 될 듯한 넓은 일본식 정원을 담이 빙 둘러싸고 있다. 그 안에서 그가 서 있는 구역만이 땅을 약간 높게 돋아 놓았기 때문에, 담보다도 키가 큰 정원수 틈새로 바깥세상을 엿볼 수 있음을 청년은 잘 알고 있었다. 여하튼 이 정원도 이 저택도, 이 부지 전부가 그의 세상이었다. 말을 바꾸면 이 넓은 땅만이 그의 세상이었고 그 바깥을 그는 거의 모른다.
가까이 다가온 인력거 소리에 귀를 기울인 청년은 제자리를 서성거리며 정말 한순간의 밀회를 기다렸다. 상대는 그의 존재 따위는 알지 못하리라. 그래도 그는 이 순간을 밀회라 부르고 있었다.
생각대로 어딘가의 화족(華族) 영애(令愛)처럼 보이는 소녀를 태우고 인력거는 청년의 시야를 지나쳤다. 삼단 같은 검은 머리의 소녀는 오늘도 그의 망막에 그 모습을 또렷하게 새겨 넣고 노을 진 거리를 빠져나가 귀갓길을 서둘렀다.
반 묶음 머리와 기품 있는 매끄러운 이마, 연분홍빛 화살 깃 무늬의 코후리소데(小振袖)에 요츠야 구 오와리 정에 있는 여학교의 교복인 캐시미어 온나하카마(女袴), 발에는 요새 유행하는 서양풍 여성 구두를 신고 있을까―?
그가 있는 자리에서는 아쉽게도 소녀의 발치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날에 따라 소녀는 고개를 떨군 채, 혹은 보자기 꾸러미를 몹시 소중하다는 듯 끌어안고 이 길을 지나갔다.
“……이야, 이제야 간신히 곧 만날 수 있겠네. 나는 계속, 계속, 그대가 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우리의 신부.”
청년은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매끄러운 흰 뺨에 가냘픈 웃음을 띠고 멀어져 가는 인력거 소리에 말을 걸었다. 그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목소리는 맨 처음부터 누구에게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의 말은 판에 박힌 하나의 정형이자 하나의 의식이자 하나의 현실이었다.
애초에 그가 입에 담은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약속되어 있었다. 또 한 명의 자신의 손에 의해서. 그래서 그는 이 닫힌 세상에 몸을 두었다. 가슴팍에 안은 책의 마른 표지를 바람이 쓰다듬었다. 책장 끄트머리가 사각사각 소리를 울려도, 청년은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쳐 간 소녀 생각을 했다.
이래저래 하는 동안, 닫힌 침묵을 조용한 목소리가 깨트렸다.
“도련님, 너무 오래 저녁 바람을 맞으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가시지요, 슬슬 방으로 돌아가시도록…….”
야무진 사람이라 안살림의 모든 이가 따르고 있는 하녀장이 말을 걸었다. 에도 말씨가 남은 맵시 있는 그녀가 길게 찢어진 눈을 가늘게 뜨고 약간 다정한 목소리로 당주에게 충고했다. 이것도 그의 일상, 낯익은 세상의 사건이다. 모든 일은 예정을 따르도록 조화되었고 안녕함만이 그의 시간을 채워 갔다.
청년은 손에 든 책을 가볍게 털더니 생글거리며 돌아보았다.
“이런, 내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정원에서 보냈나.”
“네, 고뿔 걸리시면 안 됩니다. 저녁 식사 준비도 곧 끝나오니 방에서 기다려 주시어요.”
여성치고는 키가 큰 그녀가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오로지 그의 건강을 염려해서 하는 말이었다.
“알았어, 야에. 걱정 끼쳐서 미안하군.”
하지만 별반 걱정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이 집의 당주이자 짐이자 장식인―그러한 자신을.
“……부탁할게, 세이게츠.”
그는 작디작게 그렇게 말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은 초하루. 밤이 깊어져도 달은 보이지 않으리라. 달빛의 반짝임을 연상시키는 미모의 청년은 보이지 않는 달을 생각하며 희미한 미소를 입술에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