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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3272009
· 쪽수 : 316쪽
책 소개
목차
본문에 앞서
제1장 풍류랑
제2장 물길 위의 사내
제3자 목마른 강
제4장 계영루의 달빛
제5장 학을 닮은 사람들
제6장 소쩍새가 우는 뜻
제7장 청학동의 얼굴
제8장 견우의 칠석날
제9장 갈마산에 선 선비
제10장 왕대를 심어라
제11장 첫눈 오는 날
제12장 각색 없는 사연
저자소개
책속에서
계영루에 올랐다. 동쪽 뜰에 계수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다. 한때는 눈부시게 밝은 암꽃 수꽃이 피고 더 찰 수 없어 터질 것만 같았던 삼추(三秋) 만월의 달빛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 안았던 나무였다. 백사(?使), 달빛을 나르는 사자였다. 아니, 달 속 바로 그 계수나무의 넋이 나부시 지상에 현신한 자태였다.
“이 정자도 예전에 섬진강변에 있었다는 벌래재와 같은 때 지어진 것입니까?”
“그렇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벌래재는 왜정 때 개인이 지은 것이고 이 섬호정은 하동지역의 유림이 나서서 지었다오.”
“예에? 그 국치국난의 간고(艱苦)한 시절에 병약하기 짝이 없는 선비라는 사람들이 한가하게 산수나 바라보고 풍월이나 읊자고 이걸 지었단 말씀입니까?”
그 순간 노신사는 무거운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기는 하지.”
“그렇다면 다른 숨은 뜻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작가 선생이 아까 내게 물었던 저 풍류랑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것부터 먼저 들어보겠소?”
“이곳 섬호정과도 인연이 깊은 사람입니까?”
“깊다마다. 섬호정과도 깊고 벌래재와는 인연이 더 깊고.”
노신사는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열었다.
“실은 이 섬호정에 얽힌 그 풍류랑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손 사장한테 작가 선생이 한번 다녀갔으면 좋겠노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었다오.”
“정자를 다 짓고 나면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달라고 하였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내가 뭘 달라고 할 것 같소?”
“모르겠습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소? 모른다고 하지 마오.”
남옥의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뭘 달라고 할지 그대가 알고 있는 것, 그것을 주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오직 그것만 주오.”
영대와 남옥, 그 두 사람이 앓았던 아픔을 한 편의 시로 드러낸다면 어떤 시가 될까.
두 사람 다 고통스러운 시대의 불행한 나그네로 쓸쓸히 사라졌음이 못내 안타까웠다.
서로를 가슴 깊은 곳에 묻은 채 떠났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들을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싶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