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3272894
· 쪽수 : 336쪽
책 소개
목차
낙이사촉
선어부비취
양자택일
호시탐탐
유아독존
무아지경
견물생심
동상이몽
노심초사
소탐대실
적막강산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천득아 호떡 사 줄까?”
천득어미가 호떡과 도넛, 꽈배기 등을 팔고 있는 분식센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천득어미는 천득의 얼굴을 바라보려면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서야 될 정도로 키가 작고 왜소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시장에 함께 나온 어머니처럼 정겹고 부드러웠다.
천득은 히죽 웃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호기심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천득을 바라보고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은 사내가 벙어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천득의 나이는 구경꾼들의 어림짐작으로 볼 때, 서른은 되어 보였다. 그는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덩치로 치자면 5만 인구가 산다는 변동 전체에서 따를 자가 없는 군계일학이었다. 그런데도 천득어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대여섯 살 먹은 아들을 대하는 말투다. 구경꾼들은 씨름판에 나가기만 하면 천하장사 벨트는 독차지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거구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사십 대의 분식센터 여자는 천득의 엄청난 덩치에 가슴이 덜덜 떨렸다.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바쁘게 호떡을 구워냈다. 원래 두 개에 천 원씩 팔지만 천득의 덩치에 놀라서 엉겁결에 세 개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천득어미는 분식센터 여자에게 호떡 세 개를 종이에 한꺼번에 싸달라고 말했다. 분식센터 여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호떡을 신문지에 싸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천득어미는 유난히 붉은 혀를 고양이처럼 날름거리며 갈색 입술을 핥았다.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돈을 꺼내려고 치마를 걷어 올렸다. 삐쩍 마른 하체를 감싸고 있는 것은 촌로들이 입는 고쟁이가 아니다. 월남바지도 아니었고 팬티도 아니었다. 다리가 날씬한 이십 대 여자들이나 입고 다닐 만한 눈이 부시도록 새빨간 반바지였다.
구경꾼들은 그녀가 새빨간 반바지를 입었든, 비키니팬티를 입었든 관심이 없었다. 서산에 해가 걸려 있기는 하지만 벌건 대낮에 치마를 걷어 올려도 눈을 가리거나 뒷걸음칠 사람도 없었다. 천득어미는 여자가 아니라 늙어빠진 노파일 뿐이었다.
천득어미는 빨간 반바지 주머니에서 뚤뚤 말은 지폐 뭉치를 꺼냈다. 만 원짜리 서너 장에 오천 원짜리가 섞여 있는 지폐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분식센터 여자 앞으로 내밀었다. 분식센터 여자는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굽실거리며 두 손으로 돈을 받았다.
분식센터 앞에서 호떡 세 개를 한꺼번에 먹고 있는 거인의 모습은 멀리서도 보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금방 벌떼처럼 모여들어서 백여 명이 순식간에 천득 모자를 반타원형으로 에워쌌다.
“야가, 우리 천득이유. 참 잘생겼쥬? 나는 야 어머유. 내가 살던 우리 동리 사람들은 날 보고 천득어미라고 불렀슈. 우리 천득이가 정신이 쫌 모질라기는 하지만 아는 참 착해유. 나이가 서른 살인데 이날 이때까지 남한테 해코지하는 거 단 한 번도 못 봤슈.”
천득어미가 갑자기 쥐눈처럼 작은 눈을 반짝이며 구경꾼들을 향해 돌아섰다. 양손으로 잡은 지팡이를 턱 버티고 서서, 구부러진 허리 때문에 턱을 바짝 치켜올리고 구경꾼들을 천천히 돌아다보며 목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끝내고 작고 얇은 갈색 입술을 꾹 다물고 다시 구경꾼들을 바라봤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구경꾼들 모두가 흠칫 놀라며 뒤로 한두 걸음 정도 물러섰다.
“천득이!”
“아까도 이름을 불렀잖아. ‘천득아, 호떡 사 줄까?’라고 말여.”
“이름이 희한하구먼.”
사람들은 바라보기 민망할 정도로 쪼글쪼글하고 볼품없는 천득어미의 몸에서, 저처럼 장대한 자식이 태어날 수 있을까 하는 점에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 원래 자식은 어머니만 닮으라는 법은 없다. 그들은 천득어미의 남편이 장대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며 끼리끼리 소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