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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63273419
· 쪽수 : 480쪽
책 소개
목차
제 1 부 Brolis (형제)
제 2 부 Sunus (아들들)
제 3 부 Kelione (여행)
제 4 부 Draugas (친구)
제 5 부 Vakaras (저녁)
리뷰
책속에서
이곳에 오는 것을 두려워했어야 옳았다. 사방에 아들이 있었다. 퀸은 아이를 원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늘 부족한 아빠였다. 긴 세월 아빠 자리를 지키지도 않았지만. 그런데 이제 혼자 남아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매 순간 깨닫고 있다니. 그것은 온몸이 얼음장처럼 마비되는 충격도, 수정처럼 투명한 슬픔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암담하고 우울하고 복잡한 마음이 뒤죽박죽 하나로 섞여 심장이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미스 빗커스는 팔을 뻗어 퀸의 벌어진 재킷 안 따뜻한 가슴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가슴께에서 노인의 손이 느껴졌다. 잠시 그렇게 손을 대고 있던 노인은 푸드덕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듯 손을 거두어들였다. 노인의 손바닥이 닿아 있던 곳에, 곱게 접은 아이의 사망기사가 실린 신문지와 신문지 사이에 끼운 퀸이 낸 5달러 지폐가 놓여 있었다. 노인은 말 한 마디 없이 그것을 모두 그의 가슴에 남긴 것이었다. 퀸은 자신의 외부 어딘가에서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안타까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사랑을 한없이 그리워했을 아들이 너무나 짠했다. 그것은 단순한 부끄러움 이상의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다니, 그것만으로도 마술은 충분했다.
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아들이 세 살 때 집을 떠나 여덟 살에야 돌아온 아빠가. 5년이라는 세월은 아버지라는 부실한 존재를 거뜬히 산산조각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가끔씩 소년은 녹음기를 끄고 범주 외의 질문을 하기도 했다. ‘아기는 누구를 닮았었나요?’ 이런 질문들은 오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지만, 소년이 다시 녹음기를 눌러 자신의 대답을 영원히 기록한다고 해도 이상하게도 오나는 기꺼이 그 질문에 대답을 하고 싶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은 오나의 혀와 기억을 자연스럽게 풀어주는 면역 주사 같은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간혹 어떤 것이 비밀이고 어떤 것이 비밀이 아닌지 헷갈렸다. 결국은 오나 자신도 그렇게 되었지만.
주름장식이 달린 상자에서 벨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물건을 꺼냈다. 과년도 달력 종이를 묶어 스테이플러를 찍어 만든 일종의 책자였다. 달력 뒷면에 아들이 작성한 목록이 빼곡했다. 온갖 신문에서 찾아낸, 지난 삼 년 간 퀸이 참여했던 무수한 공연의 시간과 장소 목록이었다. 퀸은 깔끔하게 배열된 책자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죽 훑어보았다. 신문에 실린 관련기사와 광고를 오려내 딱 맞는 크기로 잘라 배열하기 위해 아들이 수백 번의 가위질을 한 흔적이 역력했다. 모든 공연 일정을 그렇게 철저하게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퀸은 놀라웠다.
물론 어려운 일이지.
……
시간이 걸리는 일이거든. 루이스한테 처음 내 시선이 머물던 날부터 나는 미스 루이스 그래디가 부디 딱 한 번만 날 바라봐 줬으면, 딱 한 번만 날 알아봐 줬으면 그런 소망을 품었어. 그러고는 반짝이는 그 가능성을 상자에 든 보석처럼 몇 년 동안이나 간직했단다. 이런 걸 ‘짝사랑’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 와중에도 단어들은 술 취한 듯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처음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명사들이, 그 다음에는 백열처럼 뜨거운 형용사들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완전한 형태의 문장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마치 바닥없는 모자에서 토끼들이 깡충깡충 뛰어 나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나의 남매, 까진 무릎으로 자신이 가장 아끼는 나무를 타던 우리 오빠. 오빠 이름은 어디로 갔어? 오빠 이름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주문이 깨질까봐 겁이 나서 (이게 주문이 아니라면 무엇이 주문이겠는가?) 오나는 계속 말을 했다. 선물 포장을 벗기듯 단어 하나하나를, 모음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가며.
소년은 어둠 속에서 일어나(하나)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둘) 세수를 하고(셋) 양치를 하고(넷) 바지를 입고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고 옷자락을 여미고 재킷을 입고 모자를 썼다(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와(하나) 차고로 들어가(둘) 자전거를 꺼내어(셋) 보도까지 끌고 갔다(넷). 여명의 그늘 속에서 소년은 이제 동네 여행을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녹음기는 가죽 재킷의 깊고 포근한 실크 속주머니 안에 숨겨져 있었다. 소년은 그 재킷을 사랑했다. 쓱쓱 가죽 쓸리는 소리가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입에서 가쁘게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입김이 새처럼 빛나는 대기 속을 날아다녔다. 새 육십 마리, 새 칠십 마리, 새 구십 마리, 늘어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이제 더 이상은 마릿수를 셀 수가 없었다. 이제 새들의 노랫소리는 하나로 어우러져 부풀어 올랐고, 그 노랫소리처럼 소년도 부풀었다. 이게 모닝 코러스구나, 이게 바로 모닝 코러스야. 날아갈 듯한 즐거움이 소년의 온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