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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회를 위하여

미래교회를 위하여

(영원히 미완성인)

피터 C. 블룸 (지은이), 최태선 (옮긴이)
  |  
대장간
2017-02-13
  |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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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회를 위하여

책 정보

· 제목 : 미래교회를 위하여 (영원히 미완성인)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88970714028
· 쪽수 : 224쪽

책 소개

블룸은 지식, 의미, 헌신, 행위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들에 니체와 포스트모던의 지성인 미셀 푸코와 자크 데리다와 존 하워드 요더를 연결한다. 그는 종종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여기는 포스트모던의 이론적 연구를 제자도와 공동체의 삶에 관한 대화 안에 둘 것을 제안한다.

목차

머리말 _ 존 D. 카푸토 /
감사의 글 /
서문 /

1장. 푸코, 계보학, 아나뱁티즘 /
2장. 누가 가정Family을 정의하는가? /
3장.인내와 차연과 함께 /
막간: 고정관념들 /
4장. 상대주의 극복하기? /
5장. 전체성과 다르게 /
막간: 가진 사람이 임자 /
6장.하이데거의 신발과 아름다운 발 /
7장.폭력의 존재론을 위한 두 얼굴 /

부록 /
참고문헌 /

저자소개

피터 C. 블룸 (지은이)    정보 더보기
미국 오하이오 주 밀스버그에서 나고 자랐다. 감리교인이었던 그는 센트럴 크리스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메노나이트와 더불어 평생 이어지는 영적 순례를 시작했다. 그는 고센대학에서 철학, 종교,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고센대학에서 만난 게일 마틴과 결혼하였고, 공식적으로 메노나이트가 되어 옐로우크릭 회중에 합류하였다. 1985년 노트르담 대학에서 철학 전공으로 석사학위, 종교 사회학으로 박사 과정을 마쳤다. 피터는 미시건에 있는 힐스데일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대학의 지원 아래 아나뱁티스트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연구와 글쓰기의 전념하고 있다. 피터와 게일은 미시건 주 왈드론 가까이 있는 살렘메노나이트교회의 멤버이다. 그들에게는 두 딸, 애비와 일레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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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옮긴이)    정보 더보기
55년생 목사. 저서 『바보새되어 부르는 노래』(대장간). 역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교제』, 『혁명적 그리스도인의 시민권』, 『마태복음』, 『호세아 아모스』, 『다니엘』,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미래교회를 위하여』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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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서 문

길을 잃은 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고백록

이론이란 세상에 대한 설명에 도달하기 위해 영원히 불확실한 시도를 하는(혹은 하게하는) 기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1988: 29)

고백록? 아마도 나는 이 단어를 비교적 ‘잘못’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제목은 독자로 하여금 루소의 고백록이나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같은 어떤 위대한, 지적이거나 영적인 무게를 가진 논문이나 “아미쉬 코카인 장사의 고백록”에 나오는 무언가 선정적인 혹은 일탈한 내용을 예상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개인적인 묵상으로부터 이어지는 토론이다. 나는 자신을 문제에서 떨어트려 다소 수사적인 위치에 두기 보다는, 그러한 토론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아마 이것이 이미 스스로를 기꺼이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부르기를 원하는 저자에 대한 당신의 기대를 입증할 것이다. 당신이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를 어떤 범주에 놓을 지에 대해서는 당신의 몫으로 남겨두겠지만, 나는 거기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미셸 푸코는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고 또한 동일자에 머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우리의 서류가 적절한지 알기 원한다면 그것을 관료들과 경찰에게 맡겨라. 단 우리가 글을 쓸 때 그들의 도덕성에 우리를 넘기지 말라.”(푸코, 1972:17)고 썼다. 당신은 나의 숙고가 어떤 의미에서 아나뱁티스트적이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 오래지 않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여기서 포스트모던적 어조를 가벼이 수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나 자신을 책임으로부터 떼어놓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문제의 용어들과 함께 지금 막 시작했을 뿐이다. 이 책은 “포스트모던 이론과 아나뱁티스트 사고에서의 실험”이 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즉각 어떤 총체적인 용어상의 문제들을 일으킬 것이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포스트모던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비록 내가 여기에서 실험적으로 나 자신을 일종의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정의하고 있지만, 나는 그 용어의 사용에 관하여 깊은 양면 가치를 인정할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명확하게 묘사가능한 사고방식처럼 쓰이는 경향이 있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포스트모던은 여전히 다양하게 모순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는 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정당해 보인다. 이런 상황은 ‘기독교’라는 용어의 경우와 유사하게 여겨진다. 나는 기독교가 정확하게 무엇이냐에 대한 어떤 특별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하여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실제로 자신이 크리스천인지 아닌지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대다수가, 그들이 가는 곳, 그들이 읽는 책, 그들의 습관들, 혹은 그들의 식사 상대 때문에 여전히 크리스천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여겨지며, 또한 나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나는 정확하게 어떤 ‘주의’(ism)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전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길을 잃은(잘못된)” 포스트모더니스트이다. 종종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리며 나를 고무시키는 사상가들은 나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독립할 수 있는 ‘주의’로서의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그리고 완고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니체는 “체제에의 의지는 진실성에 대한 결핍이다.”(니체, 1954: 470)라고 말했고 나는 이 점에 관하여 그가 옳다고 강력하게 추측한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체제를 회피하는 체제로서의 또 하나의 ‘주의’로 연결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보면서, 거기에는 순환되는 농담이 있다고 추측한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니체는 그러한 농담을 이해했고 데리다와 푸코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농담을 하려는 많은 사람이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만일 내가 어떤 ‘주의’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취급한다면, 나 역시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이와 관련하여 정도를 벗어난 것에 대한 나의 고백을 나를 참된, 천재적인, 보증된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만드는 것으로 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점도 있지만, 거기에 포함된 유머를 약화시키는 것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확장하는 것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당신이 최소한 시험적으로나마 이러한 유머와 정보를 둘 다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말이 난 김에, 나는 나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수많은 다른 의미를 고백하고자 한다. 나는 가능한 인간 지식에 절대적인 기초는 없다고 믿지만, 또한 바로 그러한 절대적인 기초를 만들고자 하는 유혹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나는 인간 이해의 궁극적인 순환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이상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계몽할 수 있는 직선적인 방법들을 끊임없이 찾아왔다. 나는 몇몇 중요한 방식들 안에서 계몽주의는 그것의 길에서 떠나 레싱(Lessing)이 말한(1956) “추한 도랑”에 빠졌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옛 계몽주의는 내가 싸우는 지적인 무기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것이 이미 나를 의미상 모더니스트로 다시 되돌아가게 만들기 때문에 포스트모던 이론을 사용함으로써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에 관하여 조금 더 특별해지는 위험을 무릅쓸 것이다. 첫째, 비교적 나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의미는 데카르트에 의해 가장 분명하고 유명하게 나타난 근대 철학(modern philosophy)의 인식론적 토대주의의 거절과 연관된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던 사고의 철학적 시작은 우리가 결단코 의심할 수 없는 시작점에 근거해야만 지식을 가진다는 개념에 대한 헤겔의 분명한 거절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수한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하든지 간에, ‘이론’이라는 단어 앞에 ‘포스트모던’이라는 형용사의 배치는 그 술부가 끊임없이 반성적이며(즉, 이론적인 시선과 지향되는 것 사이의 분명한 경계에 대한 회의; 고유한 시각이 단순히 대상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자각), 확고부동하게 비판적(즉, 정치적 혹은 평가적 고려가 분명하게 경계지어질 수 있고 탐구를 통해 여과되거나 배제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의심)임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여기 사용된 이론은 수학적 모델도 아니고, 약간 좁은 의미에 있어서 종종 “가설 연역 방법”과 관련한 인과관계 설명의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가장 중요지만, 대부분의 헤겔의 읽기와 상반되게) 포스트모던이 종국과 결말의 가차 없는 의심과 어떠한 것도 그것이 영원히 의문의 여지가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주장에 의심을 내포한다고 받아들인다. 이것은 결단코 데카르트의 보편적 회의의 문제가 아니다. 내 견해에 의하면 분명하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인 미국 실용주의자들이 백 년 전에 강조한 바와 같이, 모든 것이 갑자기 의심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무엇이라도 의심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실험’으로 부르기로 선택한 이유이다. 나는 실험이, 의도적인 경험의 불안정이라는 니체의 의미 안에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변화로 이끌지도 모르는 우리의 견해에 대한 모험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직업적 과학자가 아닌 우리 대부분이 실험에서 위험의 요소를 미묘하게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방식으로 교육을 받았지만 이것은 현대 과학이 지닌 실험의 의미와의 급진적인 결별은 아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의 연구 조사 과정에서 기인하는, 우리들 대부분이 공유하는 실험에 대한 패러다임은 이미 이해된 방식 안에서 비록 실험을 하고 있는 학생에 의해 이해된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가설을 확인 또는 미확인 하게 될 연구 과정의 조심스러운 교육적 반복이다. 만일 어떤 실험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다면, 그것은 교육적으로 채택되지 않을 것이다. 아직 누구도 진정한 실험에 관하여 알지 못한다. 내가 쓰는 실험이라는 단어는 결단코 권위의 옷으로 나의 반추를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마치 내가 과학자니까 내가 말하는 것을 믿어야한다는 식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어떻게 변화와 사고로 이끌릴지를 미리 알지 못하는 위험의 존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그것을 찬성하건 반대하건 상관없이 많은 독자들이 선호하는 포스트모던 이론의 경계보다 훨씬 더 모호하고 애매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말해온 것이 당신에게 왜 이것이 그래야만 하고 포스트모던적인 관점에서 왜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닌지 의미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또한 나는 어째서 나의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의 표준에 헤겔, 피터 L. 버거(Peter L. Berger)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미국 실용주의자들, “지적 보수주의”(예를 들면, 마이클 오크샷[Michael Oakshott]과 러셀 커크[Russel Kirk] 등 )을 포함시키는지 그 이해의 맥락을 제공하기를 바란다. 사실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이론의 의미에 관하여 내가 선호하는 몇몇 진술들을 제공한 사람은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포스트모더니즘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며 조롱하기까지 하는(카스토리아디스, 1991, 1997) 최근 대륙의 사상가-이다. 예를 들어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거부가 포함되어 있는 그의 정치적 프로그램의 발전을 추적해 보면, 그가 쓴 글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지식과 행동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론 안에서 지배적 권위를 보게 하고 이론 그 자체를 한 번 주어지면 영원한 진리의 체계를 소유하는 것으로 보게 하는 수천 년 된 유산들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는 이론이란 세상에 대한 설명에 도달하려고 영원히 불확실한 시도를 하는(혹은 하게하는) 기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카스토리아디스, 1988: 29)
그렇다면 “아나뱁티스트 사고”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아나뱁티스트는 역사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 기간 동안 활동한 급진주의자들을 가리킨다. 그들 대부분은 유아세례를 거부했다.그래서 재세례를 의미하는 아나뱁티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지난 몇십 년 동안 널리 상용화 된 용법에 따라, 나는 여기에서 이 아나뱁티스트라는 단어를,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가들에게서 나온 당대의 전통과 스스로를 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 위해 다소 느슨하게 사용한다. 조직과 관련하여 말하면, 비록 자신을 아나뱁티스트 혹은 때때로 새로운(neo) 아나뱁티스트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교단에 소속된 많은 이들이 있지만, 이는 메노나이트, 아미쉬, 후터라이트, 그리고 몇몇 형제단들을 포함한다. 나는 아나뱁티스트 사고를 어떤 획일적인 방식 안에 가두고 싶지 않다. 또 내 자신의 경험이 북미 메노나이트만의 특별한 경험이라고 축소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나는 종종 볼품없지만 어느 정도 친근한 말투로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라는 말을 사용한다. 학계와 교계에서 다양한 당대의 아나뱁티스트의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많은 대화들이 있다. 나는 그 이어지는 대화들이 이 상징적인 경계들을 넘고 가로지르는 재미있고 도발적인 것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자신이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가 되었다는 사고(학문, 탐구, 이론을 포함하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환경, 관점, 패러다임, 혹은 의식의 특징인가? 그것은 개인의 믿음에 관한 특별한 부분인가, 아니면 어떤 사람의 학문적 작업에 실제로 그 사람의 삶에 향기나 소리처럼 퍼져 있는 그 무엇인가? 우연에서 비롯되었든, 선택에 의해서건 나는 내 경험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존 하워드 요더는 내게 별명을 지어주었다. 언젠가 그는 대화 중 “육체를 따르지 않는” 메노나이트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친절한 작은 감리교도들의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고, 특별히 메노나이트 고등학교에 입학한 십대에 메노나이트와 접촉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계속된 메노나이트 교육은 나의 아내(“육체를 따르는” 메노나이트인)와 헤롤드 S. 벤더의 『아나뱁티스트 비전(AnabaptistVision)』 (벤더 1944)이라는 지적이고 문화적인 부산물을 만나게 해주었으며, 그에 덧붙여 관심 운동(Concern movement, 브루크홀더[Brukholder] 참조)을 통한 그것의 왜곡 및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그것의 유산들(종종 New Left에 의해 영향을 받은)도 알게 되었다. 나는 우연에 의한 이런 상황들의 아들이었지만, 동시에 선택에 의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물론 육체를 따라 사는 자가 되느냐 그렇지 않는 자가 되느냐는 많은 메노나이트들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리 특별한일이 아니다. 나의 청소년기가 그러했듯이 메노나이트 가운데 태어나 자라는 것은 우연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연과 선택의 장소에서 스스로를 발견한다. 더 큰 문제는 우리를 발견한 장소의 지형은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이다. 훈련받은 전문 사회학 이론가로서 나의 관심의 초점은 종종 이 복잡성에 공헌한 사회문화적 정체성들과 중복된다. 만일 누군가 나의 입장에 관하여 묻는다면, 내가 경험한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향기’를 일종의 ‘공동체를 향한 그리스도 중심적 의지’로 특징지을 것 같다. 물론 우리는 아직 그러한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자유로운 개인주의’를 어떻게 포용해야할지 모른다. 이 책의 여러 내용이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나는 그 둘 사이의 어떤 선택을 시도함에 있어 동조하기도 하고 회의적이기도 하다. 키에르케고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이다(is) 라기보다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로 되어가는 중(always becoming)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이미 향기나 소리를 고정시킬수 있는, 측정될 수 있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성당 문에 못박혀야 할 논문 리스트로 잠재적으로 축소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주장으로 흐르고 있다. 나는 때때로 그와 같은 고착이 유익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분명 나 자신도 그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나의 포스트모던 관심사는 그와 같은 어떤 고착도 언제나 불확실하고, 종잡을 수 없고 언제나 주제를 만드는 손아귀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진행 중인 의미들을 동반하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용어를 따르자면, ‘체험된 것(the lived)’이다. 광범위한 고착화가 ‘고갈되지 않는 토대’(inexhaustible ground, 메를로-퐁티, 1962)를 제공한다. 때문에 개인의 체험된 삶이 ‘분명한 양식’을 가져오는 것처럼,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정체성에 의해 표시된 장소에서 체험된 삶들은 언제나 신앙고백과 논문으로 넘쳐날 것이다. 마치 우리의 체험이 수많은 다른 체험을 내포하듯 우리는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그 이상이며,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도 언제나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이다. 우리는 우연과 선택에 의해 언제나 우리가 말하는 것 그 이상의 존재이다.
이어지는 장들은 모두 따로 출판된 논문을 개정하여 모아놓은 것이다. 꼭 차례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서문도 관심이 가는 다른 어떤 장을 읽은 후에 읽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읽은 포스트모던 이론가들과존 하워드 요더의 접근 방식에 영향을 받은 나는 제시된 작품들의 ‘우발적인’ 특성을 삭제하지 않았다. 또한 부분적으로 제시된 작품들이 하나의 ‘책’으로 불린다는 의미 외에 다른 방식으로 이런 사유의 연속체가 종결된다거나 완성된다는 인상을 주기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각 꼭지의 통일성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통상 저자는 서문의 이쯤에서 책의 각 장을 요약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다. 대신 여기서 나는 어떻게 각 장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지침을 제공하고자, 세 개의 이론적 주제들(‘동기들’이 더 나은 용어일수도 있다)로 결론을 맺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들은 결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으며, 심지어 눈에 띄는 강조점도 아니다.
첫 번째 주제나 동기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자크 데리다의 사고로 가장 잘 알려진 타자성 혹은 타자이다. 만일 이 책이 이론적 중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4장일 것이다. 4장의 내용은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그 장이 가장 인상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복잡성 때문에 또한 그것이 다른 장들을 향한 아나뱁티스트의 질문들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장들 대부분은 어느 정도 4장에 의존한다. 하지만 그 세부 내용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없어도 다른 장들에서 핵심 내용 대부분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내 바람이다. 타자(대문자로 기록되는, Other)는 세 가지 수준의 의미를 가진 철학적 개념이다. 첫째 접근법이자, 가장 특별하게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 사람은 내가 알거나 경험하거나 내가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나의 경험에 넘치고, 나의 경험을 피하고, 나의 경험에 이해되지 않고, 나의 경험을 위반하고 손상시킨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것은 윤리적인 개념이다. 내가 그에 대해 책임지거나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 있어 그는 타자이다. 둘째, 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나의 경험 안에서 드러나지만, 나의 경험 안에서 그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며 급진적으로 나(나의 자아)와 다른 무엇이다. 셋째, 둘째 의미에 근거하여, 그것은 이론적 의미로, 전적 타자(Wholly Other)를 의미한다.(4장 전체는 이 세 가지 수준의 의미를 모두 논의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셋째의 구조를 밝히려는 시도이다.) 타자(때로는 다른 존재)는 차이(difference) 및 지연(deferral)과 주제에서 연결되고, 그 차이와 지연은 자크 데리다의 유명한 중심주제이다.
타자의 철학적 개념이 지난 세기 동안 발전해 온 주요 정황은 두 번째 주제 혹은 동기라 할 수 있는 흔히 현상학 혹은 현상학적 운동에 대한 언급으로 특징지어 진다. 현상학이라는 단어는 바로 “현상들(phenomena)에 대한 연구”라는 의미이다. 현상(phenomenon, 단수형)은 “나타나는 것” 혹은 “경험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19세기 후반, 철학에 현상학적 운동의 토대를 놓은 에드문트 후설은 먼저 그 단어를 철학 탐구의 구별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한 개념과 연결했다. 가장 유명한 마르틴 하이데거를 포함하여 프랑스에서 소위 “실존주의자”라고 불리는 사상가들인 후설의 많은 제자들은 현상학적 방법론을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의 기초 구조인 알고리즘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후설에게서 거의 근본적으로 벗어나 있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현상학의 개념은 누군가의 주의깊은 집중을 의도적이고 신중하게 전환시키는 방식, 일상의 경험의 특성을 새롭고 계몽적인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즉, 핵심은 일반적으로 일상 경험에 대하여 형성된 전제들을 ‘치우려는’ 노력을 통해 일상 경험을 반성하여 그 경험이 마치 ‘우연한 것인 양’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비록 20세기에 현상학이 유명해지고 영향력 있게 되었지만, 내가 여기에서 의미하는 것은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며, 내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축소시킬 수 있는 개념을 발전시킬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예비 단계로서 현상학이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때때로 현상학의 자칭 방어자들을 포함하여)에 의해 오해되는 방식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상학은 필연적으로 “일인칭” 관점으로 추적할 수밖에 없다. 경험에 참여한다는 것은 언제나 나의 경험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정신을 제외하고선 무엇에도 접근할 수 없는(철학에서는 종종 유아론으로 언급되는 가능성) 데카르트적 묘사를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현상학에 관한 이 원고는 현상학에 관한 나의 관심을 알게 된 동료가 나에게 던진 질문에 멋지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현상학이란 네 머릿속에 갇히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냐?”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은 “아니”였다. 때때로 명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데카르트와 비교했던 후설의 경우에서조차도, 현상학의 요점은 언제나 공유된 경험에 대한 분석과 묘사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타자들에 의해 확인되거나 입증되지 않은 현상학적 묘사는 없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묘사는 ‘단순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것’이다. 물론 이것을 말하는 것이 일인칭 관점과 연관된 문제를 없애는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언젠가 교수님 중 한 분이 물었다. “어떻게 ‘나’에서 ‘우리’에 이르지?” 이 질문은 현상학의 실행자들 가운데 심각한 논란을 일으켰다. 비록 내가 이 문제에 관해 최종적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적어도 작은 빛이 이어지는 장들 이곳저곳에 발산되기를 바란다. 내가 이곳에서 발전시키고 있는 핵심 주장은, 현상학의 일인칭 어조가 특권화 된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서 언급한 니체 철학의 의미에서 실험적이라는 것이다.
분명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는 세 번째 주제 혹은 동기는 상대주의(relativism)이다. 이것과 관련되어 뒤이어 언급될 주제들이 아마도 가장 복잡하고 어려울 것이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이 포스트모던 이론을 상대주의의 유형으로 혹은 거기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내가 상대주의자가 아닌지 의심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내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함에도 그렇다고 의심할 것이다. 내가 몇몇 독자들의 의심을 완전히 불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책의 나머지 부분을 읽기 위한 기조를 정하는 것을 돕기 위해 약간의 단순하고 잠정적인 의견을 제공할 것이다.
상대주의라는 단어는 때론 교묘하고 조소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한, 조소적으로 사용될 때 상대주의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즉, 다양한 상반되는 견해가 주어졌을 때 어떤 견해들이 어떤 의미에서 다른 것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확립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낫다”라는 말은 도덕적 혹은 인식론적 힘을 가질 수 있다. 사실 일반적으로 도덕성뿐만 아니라 지식과 신념과도 관련된다. 만일 이것이 상대주의가 갖는 의미라면, 나는 그것을 방어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내게 친숙한 포스트모던 이론가들 안에서도 그러한 상대주의가 방어되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말하더라도 (그리고 여기에서의 나의 의견을 단순하고 잠정적으로 만드는 것은) 많은 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많은 당대의 견해들은 상대성을 어떤 방식 혹은 다른 방식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지식과 도덕성에 관하여 말하는 우리의 방식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논리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악순환으로 변하지 않고 그와 같은 상대주의에 적응할 수 있는지, 정확히 이러한 문제들에 힘쓰는 많은 사람에게 결코 분명하게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이 책에서 이 질문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해답을 제공하는 척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향은 상대주의를 거절하기보다는 포용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왜 내가 상대주의를 포용하는지, 또한 어째서 내가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부도덕한 결과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닌지 곳곳에서 그 암시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들 역시 실험들이다.
마지막으로, 비록 이 책이 일반적으로 분명히 당대의 이론들에 얽매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이 책이 중요한 의미에 있어서 주로 교회에 관한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만일 여기서 진행되는 더 큰 실험이 있다면, 아마도 보다 넓은 아나뱁티스트 교회 이해가 포스트모던 이론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다른 대안보다 수월할 것이라는 것이 전제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상호간에 서로를 책임지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지역의 모임이라는 교회 이해는 가능성이 있다. 내가 마지막 장에서 가장 깊이 발전시킬 데리다의 사고에 호소하기 위해, 나는 실제로 아나뱁티스트적인 교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심할 것이지만 오히려 그 불가능성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리다로부터 이끌어낸 나의 제목처럼, 그것은 “미래”(영원한 미완성으로서의 교회-역자 주) 교회로서의 가능성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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