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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1156063
· 쪽수 : 276쪽
책 소개
목차
1. 행진_9
2. 도시 하이에나 _22
3. 겨울, 그 언덕에서 _49
4. 국화(菊花) _77
5. 남겨진 자 _95
6. 시인과 숙녀 _127
7. 베란다의 아침 _171
8. 거룩한 믿음의 역사 _202
9. 목마른 파도 _216
10. 화려한 날들, 그 쓸쓸한 하오 _239
에필로그 _271
저자소개
책속에서
철식은 아직 뗏장도 마르지 않은 꼴통의 무덤 앞에 담배와 술을 올렸다. 덩달아 철식도 담배를 한 대 피워물었다. 산과 들은 사랑에 빠진 처녀의 치마처럼 알록달록 나풀거렸다. 바야흐로 흐드러진 가을이었다. 하지만 철식의 호박밭은 누렇게 뜬 잎사귀와 성긴 줄기뿐이었다. 오며가며 철식의 호박밭을 기웃거린 노인들은, 호박이라는 것이 원래 주인 심성에 뿌리를 박고 사는 식물이라고 훈수했지만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심은 사람 뱃속의 두둑한 거름자리에서 덩실덩실 달덩이 같은 호박이 나뒹구는 것이라고 후렴까지 넣었지만 어리석은 철식은 그 말도 똥으로 흘려보냈다.
“그래 편안하십니까? 남의 호박밭까지 떡하니 차지하고 누운 건 또 무슨 심보래여 그래. 어쨌든 올 호박농사는 영 그른 줄 알았더니 덕분에 호박 한 덩이는 제대로 건졌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광숙씨 만큼 누렇게 익어 자빠진 호박은 찾아볼 수가 없네요. 이럴 때, 감사하다고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철식은 산소에 놓았던 막걸리를 들어 나발 불었다. 달달하고 씁쓸하고 톡 쏘는 것이 똑 꼴통의 맛이었다. 취할라, 알딸딸했다. 철식은 들고 왔던 손가방을 열었다. 괜히 열어보기가 뭣해 그대로 선반위에 올려놓은 물건이었다. 가방 속에는 별것이 없었다. 파우치와 콘돔 그리고 손지갑과 성경책 한권이 들어있었다. 죽은 사람이 세상에 남긴 것 치고는 꽤나 간소했다. 그나마 꼴통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라고는 손지갑 안에 들어있는 주민증 한 장이 전부였다. 주민증 속 꼴통은 쓸쓸한 눈을 달고 있었다. 한발 비켜선 사람의 표정 같기도 했고, 한발 다가서고 싶은 사람의 표정 같기도 했다. 꼴통은 그렇게 세상의 경계 어디쯤 유령처럼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