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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2754572
· 쪽수 : 286쪽
책 소개
목차
유종호 출간을 기념하며
박완서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이동하 감나무가 있는 풍경
윤후명 모래의 시詩
김채원 등 뒤의 세상
양귀자 단절을 잇다
최수철 페스트에 걸린 남자
김인숙 해삼의 맛
박성원 어느 날, 낯선 곳
조경란 봉천동의 유령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내 기억 속엔 없는 아버지의 공백을 채워준 건 엄마였다. 아버지가 아파서 자리에 누워 있을 때 나는 아버지 주위를 앙금앙금 기어 다니면서 소리 없이 잘 놀았다고 한다. 어린 딸을 눈으로 쫓던 아버지가 귀여움에 겨워 ‘뽀뽀’하면서 입술을 내밀면 얼른 기어가 아버지처럼 뾰족하게 만든 입술을 갖다 대 아버지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는 얘기였다. 그때 어른 딸의 뽀뽀로 잠시 고통을 잊은 병이 아버지의 마지막 병, 죽을병이었는지 감기몸살 같은 금방 털고 일어날 병이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건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젊은 아버지가 딸을 사랑했다는 게 중요했다. 나 역시 그 장면을 사진가꾸보다 더 좋아했다.
-박완서,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중에서
그때부터 길 위의 삼이 시작된 셈이었다. 집과 고향 즉, 낯익은 세계를 등지고 길을 떠남으로써 그의 생애는 시작된 것이었다. 지난 긴 세월 동안 어떤 곳, 어떤 집을 두루 거쳐 왔던가? 지금 그것을 일일이 다 기억해낼 수는 없다. (……) 그가 만년에 엉뚱한 고장에 짐을 푼 것도 서울에서 멀어지는 것을 겁내서라기보다, 막상 돌아갈, 돌아가고 싶은, 그 고향이 없어졌기 때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만년의 삶이란, 귀향의지를 포기한 삶일 수밖에. 더러 까닭 없이 마음이 썰렁해지곤 하는 것도 어쩌면 그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동하, 「감나무가 있는 풍경」 중에서
여름이 시작되며 어머니는 더욱 병세가 깊어졌다. 어머니는 열아홉에 나를 낳았다. 나는 탄생했으며, 그동안 많은 고행의 길을 거쳐 이곳에 이르렀다. 그리고 예전에 그랬듯이 꽃 한 송이를 들고 어머니를 바라본다.(……) 어머니는 병상에서 내게 손을 뻗었다. 이미 시간을 다투는 생명임을 모두는 알고 있었다. 빨리 죽지 않으니, 어떡하느냐는 당신의 말을 나는 어떻게 새겨들어야 하는지 망연할 뿐이었다. 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를 살려낸 손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많은 말들이 그 손끝에서 묻어 나왔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실로 오랜만에 잡아보는 손이었다.
-윤후명, 「모래의 시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