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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야 할 우리 소설 2

꼭 읽어야 할 우리 소설 2

(중고생 눈높이)

김동인, 염상섭, 전영택 (지은이), 박동규 (엮은이)
  |  
평단(평단문화사)
2010-06-21
  |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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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야 할 우리 소설 2

책 정보

· 제목 : 꼭 읽어야 할 우리 소설 2 (중고생 눈높이)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고전
· ISBN : 9788973433254
· 쪽수 : 368쪽

책 소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국어와 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들을 낱낱이 찾아 싣고 알찬 해설을 더한 한국 소설 선집 제2권. 우리 근대 소설의 개척자인 김동인의 '배따라기'를 비롯하여 인도주의 색채의 작품으로 알려진 전영택의 '화수분', 그리고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 염상섭의 '두 파산'에 이르기까지 3작가 12작품이 실려 있다.

목차

김동인
배따라기 | 태형 | 감자 | 광염 소나타 | 발가락이 닮았다 | 붉은 산 | 광화사

전영택
화수분

염상섭
표본실의 청개구리 | 만세 전 | 삼대 | 두 파산

저자소개

김동인 (지은이)    정보 더보기
호는 금동琴童, 춘사春士. 평양 진석동에서 출생했다. 기독교 학교인 평양숭덕소학교와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의 도쿄 학원, 메이지 학원, 가와바타 미술학교 등에서 공부하였다. 1917년 일본 유학 중 이광수(李光洙), 안재홍(安在鴻) 등과 교제하였다. 1919년 전영택, 주요한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를 발간하였다.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시작으로 「목숨」, 「배따라기」, 「감자」, 「광염 소나타」, 「발가락이 닮았다」, 「광화사」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 혁신에 공헌하였다.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24년 폐간된 [창조]의 후신 격인 동인지 [영대]를 창간했다.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삼천리]에 「광염 소나타」를 발표했다. 1932년 [동광]에 「발가락이 닮았다」, [삼천리]에 「붉은 산」을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조선일보에 학예부장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고 1935년 월간지 [야담]을 발간하였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소설 쓰기에 전념하다 마약 중독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던 중 1939년 ‘성전 종군 작가’로 황국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 불경죄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44년 친일소설「성암의 길」을 발표하였다. 1948년 장편 역사소설『을지문덕』과 단편「망국인기」를 집필하던 중 생활고와 뇌막염, 동맥경화로 병석에 누우며 중단하고 1951년 6·25 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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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7년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태어난다. 중인 계층의 서울 토박이라는 계층적 특징은 염상섭 문학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그의 소설에서는 풍부한 서울말의 흔적과 근대적 삶에 대한 예민한 현실 감각을 찾아볼 수 있다. 관립 사범 학교를 중퇴하고 보성학교 중학 과정을 수학하던 중 1912년 염상섭은 일본 유학을 떠난다. 일본군 육군 중위였던 맏형의 도움으로 교토(京都)부립 제2중학을 마치고 이후 게이오의숙대학(慶應義塾大學) 예과 1학기를 다니다 자퇴한다. 그러던 중 조선에서 발생한 3·1 운동의 소식을 듣게 되고, 이에 3월 19일 오사카 덴노지(天王寺) 공원에서 단독적으로 독립 선언을 주재했으나 거사 직전 검거된다. 약 3개월간의 수감 후에는 요코하마의 복음(福音)인쇄소에 취직해 직공 노릇을 한다. 이 시기 경험한 양가적 경험, 즉 ‘근대 그 자체로서의 일본(문학)에 대한 의식’과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문제’는 이후 염상섭 문학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구체화된다. 1920년 1월 ≪동아일보≫ 기자로 임명된 염상섭은 귀국해서 정경부 기자로서 활동하다 1920년 7월 사직한다. 염상섭은 ≪폐허≫ 창간호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1920년 하반기부터 1921년 봄까지 오산학교에서 교직 생활에 몸담기도 한다.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고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24년 ≪시대일보≫에 발표된 ≪만세전≫은 염상섭 문학의 전환점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문학적 성취는 1926년에서 1928년 사이에 이뤄진 두 번째 일본 유학과 결부되어 보다 심화된 문제의식으로 나아간다. 일본 유학 중에도 염상섭은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혈통, 혼혈)를 밀도 있게 다룬다. 1928년 2월 귀국해서 ≪이심≫, ≪광분≫ 등을 연재하는 것에 이어 마침내 1931년 ≪삼대≫를 발표한다. 1920∼1930년대 발표된 염상섭의 작품들은 식민지 근대의 문제를 탐구하며, 식민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에 관한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역사와 사회·현실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이를 깊이 있는 문제의식으로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적 성격을 나타낸다. ≪삼대≫ 이후 염상섭은 ≪백구≫, ≪모란꽃 필 때≫, ≪불연속선≫ 등의 장편 소설을 발표하지만, 이들 작품은 앞선 시기의 작품들에 비해 통속화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가운데 1930년대 중반 염상섭은 돌연 만주행을 선택한다. 진학문의 권유로 ≪만선일보≫의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며, 1939년 만주 안동 대동항 건설 사업 선전에 종사한다. 이 기간 중 염상섭은 장편 소설 ≪개동≫을 집필하고, 안수길·박영준 등의 창작집 ≪싹트는 대지≫와 안수길의 창작집 ≪북원(北原)≫ 등의 서문을 쓴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창작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약 10여 년의 기간 동안 그는 일종의 ‘문학적 단절’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해방된 서울로 돌아온 염상섭은 <해방의 아들>을 발표하며 다시금 문학 활동을 이어 가고, ≪경향신문≫ 창간 당시 편집국장으로 근무하기도 한다. 해방의 감격과 함께 곧이어 마주하게 된 ‘해방 이후’ 식민지의 모순, 미소 분할과 신탁 통치, 남북 분단 등의 혼란한 사회 현실의 모습을 <엉덩이에 남은 발자국>, <삼팔선>, ≪효풍≫ 등의 작품을 통해 세밀하게 그려 낸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지만 염상섭은 피난을 떠나지 못한다. 9·28 서울 수복, 10·25 중공군 개입, 1951년 1·4 후퇴의 혼란 속에서, 염상섭은 윤백남, 이무영 등과 함께 해군에 입대해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부산과 서울 정훈감실에서 해군 소령으로 복무한 뒤, 1954년 5월 임시 중령으로 전역한다. 전쟁의 발발과 폐허가 된 전후(戰後)의 현실 등과 같은 역사적 비극 앞에서, 염상섭의 소설은 일상적 삶의 감각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1950년대 중후반 이후 발표되는 일련의 후기 작품들은 주로 남녀 연애담에 기반한 결혼과 가족의 문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염상섭은 1963년 3월 14일 서울 성북동에서 타계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의 삶은 서울에서 마무리된다. ‘작가’ 염상섭이 남긴 빛나는 작품들은 여전히 여기에 남아 있다. 염상섭은 평생에 걸쳐 작품 창작에 임하고, 소설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붙들었던 작가였다. 그가 보여 주는 치열한 소설 쓰기의 모습은 시대를 헤쳐 나가는 염상섭이라는 한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거대한 물줄기로서 정립되어 가는 한국 문학사 그 자체의 역사와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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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택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4년 평양성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한문을 익혔으며 11세 때부터 보동학교, 대성학교에서 수학했다. 19세 때부터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에서 공부하여 고등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으로 진학하여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19년, 26세 때 김동인, 주요한 등과 함께 문예지 「창조」를 발간했으며, 동경 유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창조」를 중심으로 하여 '혜선의 사'를 시작으로 여러 편의 단편 및 중편소설을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화수분'은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되었다. 1927년 목사가 되어 각종 목회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감리교신학교 교수와 「기독신문」의 주간을 지냈다. 이후 국립맹아학교 교장, 중앙신학교 교수, 「한국복음신문」등의 주간을 역임하였으며, 1968년 7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며 종교적 색채를 작품 속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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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39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출생.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석사·박사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등단.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월간 시 전문지 《심상》의 편집고문. 저서로 『현대 한국소설의 성격 연구』, 『한국 현대소설의 비평적 분석』, 『현대 한국 문제 작품 분석』, 『전후 한국소설의 연구』 등의 논문집과, 문장론집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수필집으로 『별을 밟고 오는 영혼』, 『당신이 고독할 때』,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 『오늘, 당신이라 부를 수 있는 행복』, 『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 『삶의 길을 묻는 당신에게』,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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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어두워져서도 그는 불도 안 켜고 성이 나서 우들우들 떨면서 아내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아내의 참 기쁜 듯이 웃는 소리가 그의 아우의 집에서 밤새도록 울리었다. 그는 움쩍도 안 하고 그 자리에 앉아서 밤을 새운 뒤에 새벽 동터 올 때, 아내와 아우를 죽이려고 부엌에 가서 식칼을 가지고 들어와서 문을 벌컥 열었다.
그의 아내로서 만약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그 문밖에 우두커니 서서 문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아내와 아우를 죽이고야 말았으리라.
그는 아내를 보는 순간 마음에 가득 차는 사랑을 깨달으면서, 칼을 내던지고 뛰어나가서 아내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이년 하면서 들어와서 뺨을 물어뜯으면서 함께 이리저리 자빠져서 뒹굴었다.
김동인 「배따라기」


저는, 그날 밤 혼자 몰래 그 여자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칠팔 시간 전에 묻어 놓은 그의 무덤의 흙을 다시 파서 그의 시체를 꺼내어 놓았습니다.
푸르른 달빛 아래 누워 있는 아름다운 그의 모양은 과연 선녀와 같았습니다.
가볍게 눈을 닫고 있는 창백한 얼굴, 곧은 콧날, 풀어헤친 검은 머리?아무 표정도 없는 고요한 얼굴은 더욱 처염함을 도왔습니다. 이것을 정신이 없이 들여다보고 있다가 저는 갑자기 흥분이 되어?아아 선생님, 저는 이 아래를 쓸 용기가 없습니다. 재판소의 조서를 보시면 저절로 알 것이올시다.
그날 밤에 된 것이 ‘사령’이었습니다.
김동인 「광염 소나타」


생각하면 재미있는 연극이외다. 생식 능력이 없는 M은, 그런 기색도 보이지 않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M에게로 시집을 온 새 아내는 임신을 하였습니다. 제 남편이 생식 불능자인 줄을 모르는 아내는, 뻐젓이 자기의 가진 죄의 씨를 M에게 자랑하고 있을 것이외다. 일찍이 자기가 생식 불능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점을 밝혀 주지 않은 M은, 지금 이 의혹의 구렁텅이에서도 제 아내를 책할 권리가 없을 것이외다. 그가 검사를 하겠다 하나, 검사를 하여서 자기가 불구자인 것이 판명된 뒤에는 어떤 수단을 취할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내의 음행을 책하자면, 자기의 사기적 행위를 폭로시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외다. 그것을 감추자면, 제 번민만 더욱 크게 할 것이외다.
김동인 「발가락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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