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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라이트 노벨 > 앨리스 노벨
· ISBN : 9788960525542
· 쪽수 : 226쪽
책 소개
목차
[01] 요리는 도구부터
[02] 입맛을 돋우는 전채 요리
[03] 식사 중에도 방심은 금물!
[외전] 수상한 상견례
후기
책속에서
머리맡의 창을 통해 빛이 한가득 들어왔다. 잿빛 머리의 남자는 하얀 막대를 입에 물고 퀭한 눈으로 바닥을 응시했다. 날이 밝아질수록 그를 뒤덮은 어둠의 그림자는 점점 짙어져 갔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여밈이 뜯긴 원피스와 보기도 민망한 여성용 속옷은 사라지지 않았다. 얇은 시트 아래 제 몸이 나체 상태라는 것도 변함이 없었다.
“으응…….”
짜증이 섞인 신음에 남자는 넓은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돌렸다. 이불 아래 드러난 봉긋한 가슴, 잔뜩 울어 붉어진 눈가. 그리고 하얀 몸에 선명하게 새겨진 지난밤의 흔적. 그가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거기 있었다. 착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는 근심 걱정 없는 표정으로 잠든 그녀를 자괴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그녀가 다시 뒤척이자 팔을 뻗었다. 커튼을 쳐 준 덕에 끈질기게 달라붙던 빛에서 해방된 그녀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일단 당장 그녀와 얼굴을 맞댈 필요가 없게 된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으음, 교수님……?”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잠에 취한 목소리에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다 뜨지도 못한 눈을 휘어 마냥 해맑게 웃으며 그를 향해 안아 달라는 듯 팔을 뻗었다. 떡 벌어진 어깨가 움찔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응하려던 그는 차마 그런 그녀를 안아 주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황녀님을…….”
그의 목소리가 앓듯 사그라졌다. 흐릿한 기억 속 선명한 붉은색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거칠게 그녀의 안에 파고들어 처녀막을 찢어발기고 속을 탐했다. 심지어 아무런 조치도 없이 내부에 싸지른 그의 정액이 고귀한 몸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지난밤의 일을 되새길수록 그의 고개는 숙여졌다.
그는 무도한 짐승처럼 여린 몸을 농락한 것을 떠올리며 자괴감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다 벗은 여자가 달려들어도 싸늘한 눈으로 외면한다 해서 돌고 있는 망측한 소문과는 달리, 어젯밤 그는 욕정의 노예가 되어 여린 몸을 탐했다. 여전히 귓가를 맴도는 울음 섞인 신음에 그는 짙은 후회의 기색을 비쳤다.
“제가 왜 그랬는지……. 수련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운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멍하니 생각을 더듬던 그녀는 이내 손뼉을 마주치며 방긋 웃었다.
“교수님 문제가 아니라 제 음식 때문인 것 같은데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달리 이어지는 그녀의 음성은 밝기만 했다. 그제야 그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지난밤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고 나서부터 몸에 열이 나고 정신이 아찔해졌었다.
“그러니까 어젯밤 제가 발…… 정 난 짐승 새끼처럼 군 게, 황녀님이 주신 요리 때문이란 말입니까? 단순히 체력 보강 음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이를 악물며 물었다. 원망하려는 것보다는 다시 같은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뭘 먹였던 간에 정신을 못 차리고 덤벼든 것은 제 탓이었다.
“아, 그게, 새벽에 로디잎에 맺힌 첫 번째 물방울을 넣고 만드는 건데. 역시 그놈의 달팽이가 꼴깍 마셔 버리고 제가 얻은 건 두 번째 물방울이었나 봐요.”
잠시 잠깐 잠이 들었었노라고. 레시피가 잘못 되었나 보다 얘기하는 그녀의 얼굴도 마냥 해맑았다. 그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황녀님이 만든 건…….”
“아마도 미약?”
그녀는 헤헤 웃으며 귀엽게 눈을 찡긋거렸다. 동시에 흥분 섞인 낮은 신음이 흘렀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욕정을 느껴 발딱 서 버린 제 아래를 향해 욕을 짓씹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런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답지 않게 망설이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체력 보강제는 역시 필요 없었나 봐요. 어제 보니까 교수님, 으흣, 짱짱하시던데요.”
발칙한 시선이 그의 하체에 머물렀다. 이내 그녀의 얼굴이 더없이 붉어졌다.
“그, 그러니까 제가 필요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그녀 또한 그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그녀의 시선에 희롱당한 것에 슬퍼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속으로 기사의 약속을 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녀는 맑은 눈동자로 말이 없는 그를 응시했다. 간밤에 그를 몇 번이고 절정에 오르게 했던 여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순진한 빛이었다. 보고 있으려니 묵직한 한숨이 우러나왔다. 애초에 약초의 구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알-꼬르네오의 요리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먹어 치운 제 탓이었다.